생활속의 성경 -주방(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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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백인 세실리아 작성일19-12-17 16:03 조회1,195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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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지면에서 집에 자리한 주방의 의미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았다. 주방은 ‘생명’과 ‘존재’를 유지하는 ‘음식’과 ‘생각’을 ‘나누는 곳’이자, 불이나 식기류 등과 같이 잘 정돈된 다양한 요소들을 이용해 서서히 시간을 들여 ‘조리하는 곳’이다. 그렇다면 주방의 성격인 ‘나눔’과 ‘조리’가 성경에서는 어떻게 묘사되고 있을까?
먼저 음식을 ‘조리’하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본다면, 어렵지 않게 ‘불’을 떠올릴 수 있다. 성경에서는 보이지 않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조리하시는 ‘불’처럼, 우리의 딱딱하고 차가운 부분을 이웃들을 위한 음식으로 부드럽게 요리하시는 ‘불’처럼 종종 등장하신다. 구체적으로 자기 동족의 비난을 받아 이집트에서 미디안으로 도망하여 무거운 마음의 짐을 지고 있던 모세의 이야기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그는 불타고 있지만 타버리지 않는 떨기나무를 본다. 신기하고 희한한 자연현상 정도로 치부해 버릴 수 있었음에도 모세는 그 오묘한 장소로 ‘끌리듯’ 걸음을 옮긴다. 그러다 자신의 눈으로 보게 된 현상 뒤에 숨겨진 하느님의 목소리를 듣고 자신을 멈춰 세운다. ‘말씀’하고 계신 분이 자기 선조들을 이끌어 오셨던 분임을 깨닫고는 선조들이 그랬듯 ‘예, 여기 있습니다’라고 대답한다. 그리고 모세는 거룩한 장소에 들어가는 것을 자각하여 ‘두려운 마음’으로 자신의 신발을 벗고 얼굴을 가린다.
여기서 유심히 보아야 할 것이 있다. 보이지 않는 하느님은 ‘말씀’과 ‘행적’을 통해 불처럼 사람들의 마음을 조리하신다는 사실이다. 외적으로 드러난 사건은 수단과 방법이지만 중요한 것은 그 사건을 통해 모세가 하느님과 실제로 만났다는 데에 있다. 하느님께서는 ‘떨기나무의 불’로 모세의 마음을 조리하셔서 모세가 당신에게 다가갈 수 있게 하셨고, 만나고 들을 수 있게 하셨으며, 거룩한 영역으로 옮겨 주기까지 하셨다.
다음으로 식탁에서 이뤄지는 ‘나눔’ 행위에 대해 생각해 보자.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함께 모여 서로 ‘빵’을 나눈다. 나누어진 빵은 실제 예수님의 나누어진 몸이 되어 우리에게 영해지고 우리 생명을 부지하는 양식이 된다. 성당에서 외적으로 거행되는 이 체험은 이천 년 전 예수님께서 세상에 계시는 동안 늘 반복하셨던 ‘식탁에 둘러앉는 행위’로 우리를 초대한다(세리들과 함께 식탁에 앉는 것, 빵을 많게 하신 기적 등). 이 행위는 당신의 분명한 삶의 계획을 요약하고 ‘당신을 기억하도록’ 제자 공동체를 초대하시면서 마지막 순간에 명하시며 취하신 모습이다.
구체적으로 예수님의 식탁에서 어떤 일이 있었을까? 최후의 만찬을 예로 들자면, 예수님은 제자들과 먹게 될 빵을 들고 ‘감사의 기도’를 바치셨다. 만일 그 빵을 ‘당연한 내 것’이라 여기셨다면 감사드릴 필요가 없었다. 그 일용할 빵을 허락하신 분이 있기에 감사를 드린 것이다. 그리고 그 주어진 빵은 이내 나뉘어져 많은 이들의 생명을 지속시키는 양분이 된다. 누군가 나에게 일용할 양식을 허락하여 생명을 얻게 되었다면 그것을 받은 나 역시 내 주변에 있는 이에게도 그렇게 해야 함이 마땅하기 때문이다. 이 부분에서 예수님은 ‘의미가 감춰진 상징의 상태’를 제자들에게 보여주는 것에만 머무르시지 않는다. 당신 자신이 온전히 하느님으로부터 온 ‘받은 빵’이시자 ‘나눠지는 빵’ 자체라고 그 자리에서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나아가 제자들에게는 이를 행하라고 덧붙이신다. 이렇게 예수님의 감사와 제자들의 감사는 바로 ‘주어져 받게 된 빵’과 ‘나누어 주는 빵’ 사이에 위치한다.
하느님은 우리의 마음을 당신의 불로 조리하셔서 우리가 당신을 만나, 당신으로부터 받은 무상의 선물에 대해 감사드릴 수 있게 하신다. 받은 선물에 대한 감사는 이것이 온전히 내 것이 아님을 동반하기에 ‘나눔’에까지 이르게 되는데 그 나눔의 자리에서 형제와 식구의 진정한 의미가 피어난다.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온기로 서로의 마음을 데우고 영적으로 육적으로 나눔을 실천할 수 있는 곳이 바로 주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