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신학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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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9-04-17 18:01 조회1,327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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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행복이 성취되는 지점 곧 하느님께서는 이혼을 창조하지 않으셨다. 이혼은 인간이 고안해 낸 행복을 위한 인간의 발명품일 뿐이다. ‘한처음에는’ 사람이 하느님께서 지으신 여자 앞에서 발하는 경이, 그 앎과 사랑의 찬탄, 이 찬탄이 가져 온 ‘한 몸’의 사건이 존재했다(창세 2, 22-24 참조).
둘이 어떠한 경우에도 더 이상 쪼개질 수 없는 한 몸이 되는 것은 ‘인간적으로 볼 때’ 정말 재앙에 속하는 일일까? 하지만, 셋이서 ‘영원으로부터 영원까지’ 하나로 계시는 분, 참 행복과 참 사랑 자체이신 삼위일체 하느님께서 “당신의 모습으로”(창세 1, 27) 창조하신 사람은 ‘본래’, 남자와 여자, 이들이 이루는 ‘한 몸’이었다. 영원히 한 몸으로 사는 것은 참 행복이요 참 사랑 자체이신 삼위일체 하느님처럼 사는 것에 다름 아니다. 가장 자연스럽고 근원적인 욕망에 따른 삶에 속한다.
인간이면 누구나 이 사실을 ‘어느 정도’ 알고 있다. 연인들이 ‘너만을 영원히 사랑할 거야!’라고 자연스럽게 말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단 한 사람을 영원히 사랑하는 데에 참 행복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아는 까닭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다. 영원한 사랑에 ‘십자가의 길’이 틀림없이 존재한다는 사실도 안다.
온갖 역경 중에도 갈라서지 않으려고 애쓰며 사는 이들은 창조주 하느님께서 좋으심, 삼위일체 하느님께서 사랑이심, 하느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결코 떠나지 않으심, 신랑이신 그리스도께서 신부인 교회를 절대 버리지 않으심을 ‘증거한다’. 삼위일체 하느님의 행복과 사랑에 자신의 갈망이 본래 자리하고 있음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로써 인간이라는 사실로부터 비롯되는 자신의 고귀한 품위를 ‘재발견한다’.
하느님과 그분의 교회는 인간 실존의 앎과 사랑, 그 불완전함과 연약함을 모르쇠하지 않는다. 성사은총은 그리스도의 빛과 힘을 배우자들에게 ‘실제로’ 부여해 준다. 그리스도인이므로 이혼을 ‘못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나에게 지옥처럼 여겨지는 한 사람까지 ‘영원히 사랑할 수 있게 되는’ 힘을 발휘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므로 ‘원수를 사랑해야 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원수까지 사랑할 수 있게 되는’ 능력을 갖추게 되는 것이다. 사랑은 은총(선물)에서 시작되어 은총(선물)으로 완성된다.
지옥 같은 한 인간을 벗어 던져야만 천국을 비로소 맛볼 수 있는 것일까. 원수를 향한 불타는 증오를 과연 인간적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일까. 내가 지금 생각하는 행복이 내가 본래 갈망하는 행복과 늘 일치하는 것일까. 인간보다 먼저 계시고, 인간보다 먼저 인간을 아시며, 인간보다 먼저 인간을 사랑하시는 창조주 하느님께서 ‘한처음에’ 지니고 계셨던 계획에 따르면, 인간은 인간이 생각하는 자기 자신, 바로 ‘그 이상’이다. 하느님의 생각은 인간의 그것과 다르다.
자기 자신. ‘나’는 ‘너’의 존재로 인해 ‘나임’을 깨닫고 ‘남자’는 ‘여자’의 존재로 인해 ‘남자임’을 깨닫게 된다. ‘다름’의 존재는 ‘정체성’에 대한 인식의 근원이다. ‘인간’은 ‘하느님’ 앞에서 자신이 ‘인간’임을 분명히 알게 된다. ‘나’가 ‘너’로, ‘남자’가 ‘여자’로, ‘인간’이 ‘하느님’께로 자신을 벗어나 나아갈 때 ‘그 이상’이 된다. 성장한다. 이 벗어남을 사랑이라고 한다. 다름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다르기 ‘때문에’ 사랑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