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신학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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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9-04-17 18:04 조회1,361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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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름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다르기 ‘때문에’ 사랑할 수 있다. 나와 너, 남자와 여자, 인간과 하느님은 무엇보다 ‘내 몸’으로 인해 다르다. ‘내 몸’이 극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다름 때문에 ‘나’는 사랑할 수 있다. 다름은 ‘나’의 한계 조건이기에 앞서 ‘벗어남’ 즉 초월 조건이다. 또한 나를 ‘나’로서 의식하게 해 주는 자의식의 근원지이다. 한처음에 사람은 짐승들 사이에서 “자기에게 알맞은 협력자를 찾지 못하였다”(창세 2, 21). 사람은 짐승들 앞에서 그것들과 다른 존재라는 사실을 스스로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몸’으로서 달랐다. 인간의 몸은 짐승의 몸과 다르다.
‘자기에게 알맞은 협력자’를 찾지 못한 사람의 고독. 그러나 사람의 고독은 완전히 홀로 있는 상태를 뜻하지 않는다. 스스로 자신을 유폐시키지 않는 한, 완전히 홀로 있을 수 있는 사람이란 없다. 한처음에서 발견되는 사람의 고독은 하느님과 함께 있는 복된 상태를 의미한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따르며 그분의 시선을 한몸 가득 받고 있었다(창세 2, 16-19 참조). 사람의 고독은 ‘본래’ 이와 같다. 내 심연 저 편, 그저 ‘나’만이 있을 수 있다고 여겨지는 바로 그 지점에서 하느님의 시선이 ‘나’에게 쏟아지고 있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분의 말씀이 들려오고 그분 말씀에 이끌리는 ‘나’를 발견한다. 기도하는 이들이 찾는 고독이 바로 여기에 있다. 이 지점을 우리는 자주 ‘양심’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나’의 온전한 초상은 늘 그렇게 ‘나(+타자)’를 말한다. 한처음부터 ‘나’는 나로서만 존재할 수 없는 존재이었다. ‘관계’가 배제된 ‘고독’은 존재하지 않는다. 관계 안에서 또는 그것을 통해서만 고독은 비로소 존재한다.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으니, 그에게 알맞은 협력자를 만들어 주겠다”(창세 2, 18). 이 ‘좋지 않음’은 인간으로서의 어떤 ‘결핍’을 지시하지 않는다. 오히려 ‘충만’에 대한 것이다. 남자 혹은 여자 그 자체만으로도 ‘사람’이다. ‘반쪽 인간’이 아니다. 하느님께서 사람에게서 갈빗대 하나를 빼내어 여자를 지으셨다는 사실(창세 2, 21-22)은 남자와 여자가 ‘몸’으로서는 다르지만 ‘사람’으로서는 동일함을 의미한다. 이같이 사람은 남자와 여자로 창조되었다(창세 1, 27). 그리고 “하느님께서 보시니 참 좋았다”(창세 1, 31). 남녀가 이루는 “한 몸”(창세 2, 24)은 서로 다른 ‘온전한’ 사람들의 결합을 뜻한다. 성부, 성자, 성령이 각각 한 분이신 하느님의 삼등분이 아니듯이, 남자와 여자 각각은 인간의 이등분이 아니다. 또한 하느님께서 성부, 성자, 성령으로서 하느님이시듯, 인간은 남자와 여자로서 인간이다.
온전히 그 자체로 인간인 남자와 온전히 그 자체로 인간인 여자가 이루는 ‘둘의 결합’ 곧 ‘한 몸’은 성부, 성자, 성령께서 영원으로부터 영원까지 이루고 계시는 사랑과 친교의 모상이 된다. 성부와 성자의 사랑과 친교에 성령께서 자리하고 계시듯이 남자와 여자의 결합과 일치에는 ‘제3자’라는 인간이 늘 내포되어 있다. 성령께서 하느님의 영원한 사랑의 현존과 활동을 드러내듯이, 남녀 간의 결합에 내포된 ‘제3자’ 또한 그러하다. 남녀 사이의 결합은 그 자체로 이미 ‘영원’을 향한 갈망과 지향을 담고 있다. 이는 그들의 일치를 통해 하느님께서 빚으시는 당신의 작품, 또 하나의 ‘창조된’ 인간 즉 ‘하느님의 모상’인 자녀들을 통해 실제로 담보된다. 혼인이란 본래 이러하다. 인위적·역사적 제도가 아니라, 하느님의 창조 계획 안에 있는 자연적·신적 제도이다. 이를 통해 ‘나’는 ‘나 이상’으로 성장하고, 언제 스러질지 알 수 없는 사랑은 튼튼한 바위 위에 집을 짓게 된다. 혼인은 연애의 ‘무덤’이 아니라 사랑의 ‘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