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신학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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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백인 세실리아 작성일19-05-29 16:52 조회1,351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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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인은 사랑의 육화이다. 육화된 사랑은 ‘몸을 지닌 존재’인 인간에게 더욱 ‘알맞다’. 혼인은 보다 ‘인간적인’ 사랑을 의미한다. 불현듯 내게로 ‘들이닥친’ 사랑을 초월해 가는 사랑이다. 내 지성과 의지로 빚어내고 자유의지로 ‘선택하는’, 그런 사랑이기 때문이다. ‘감정’으로서의 사랑이 ‘의지’로서의 사랑으로 변모·성장해 감을 뜻한다.
그래서 이 성장은 책임을 동반한다. 허기가 채워질 때까지 울음을 멈추지 않던 갓난아기가 성장하면 식사 시간까지 배고픔을 참을 줄 안다. 사랑의 ‘성장’, 혼인에서의 사랑도 마찬가지다. 아무 것이나 먹지 않고 또 그 양을 적절히 조절할 줄 알게 된다. 이렇게 ‘밀려오는’ 사랑이 성장하면 ‘수행하는’ 사랑이 된다. 부부애는 즉각적인 칭얼거림을 넘어선 사랑이다. “기쁠 때뿐 아니라 슬플 때에도” 배우자에게 ‘나를 선사하겠다’는 사랑을 말한다.
사람의 성장이 ‘자연스러운’ 것처럼 사랑의 성장 또한 그러하다. 사랑에 대해 그 성장을 요청하는 것은 그것이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사람이 유년 시절에만 머물러 있을 수 없듯이 사랑도 ‘충동’이나 ‘열정’의 단계에만 머물러 있을 수 없다. 성행위의 빈도가 부부 간의 사랑을 가늠해 주는 척도는 못 된다.
성장이라는 사랑의 내적 요청을 부정하고 배제할 때에 성적 욕망의 무분별한 배설을 사랑과 등치시키려는 시도가 등장한다. 그러면서 “사랑하는 것이 죄인가요?”, “몸이 요구하는 데 어쩌란 말이예요?”라고 옹알이로 반문하는 목소리가 커진다. 자신을 다 큰 성인이라고 자부하면서 아무데서나 그리고 아무렇게나 바지에 오줌을 지리는 행위는 그다지 ‘자연스럽지 않다’.
사랑의 성장은 신체의 충동이 의지와 지성 즉 정신 활동을 스스로 요청하고 있음을 말해 준다. 신체의 충동이 사랑의 욕망을 알리고, 정신은 이 욕망을 완성시키는 몫을 지닌다. 정신의 관여를 성 충동의 ‘억압’으로 여기는 이들의 사유에는 육체와 정신을 대립 구도로 파악하며 이를 분열시키려는 기조가 있다. 몸의 언어는 그 자체로 ‘정신적’이다. 모든 단어가 거기에 상응하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과 같다. ‘빵’이라는 단어를 보고 ‘물고기’를 떠올리는 이는 ‘빵’이라는 언어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사랑은 몸의 언어를 바로 읽어 내는 능력을 요구한다. 즉 사랑하기 위해서는 사랑을 ‘배워야 할 필요’가 있다.
아름다운 여성에게 모든 남성의 몸과 마음은 이끌린다. 이 이끌림대로 자신의 욕망을 채워가는 데에서 사랑의 성장은 발견되지 않는다. 영화 속 예쁜 여성을 보고 몸이 거기에 반응한다고 해서 그녀를 사랑하게 되었다고 믿는 이는 사랑을 모르는 사람이다. 눈을 사로잡은 낯선 여성으로부터 시선을 서둘러 거두는 유부남은 자신의 신체를 자신의 정신과 ‘통합’시키려는 자라고 할 수 있다. 성 충동을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의미에 맞추어 ‘조율’하는 것이다. 소음을 음악으로 변화시켜 가는 과정이다. 이 과정에서 신경증(노이로제)이 발생한다고 주장하는 근대 심리학은 신체의 무정부주의를 불행히도 ‘인간 해방’이라고 주장해 왔다. 바로 여기서 ‘성 해방’이 논의된다.
성 충동이나 감정은 사랑의 여정에서 매우 중요하다. 이것들은 한 사람과의 인격적 만남이라는 ‘속뜻’을 지닌다. 하지만, 이 만남보다 성 충동이나 감정 그 자체를 앞세울 때, 사랑은 좌절되고 만다. 충동이나 감정이 사라지고 나면 주저앉는다. 사랑에 있어서 충동과 감정은 ‘자기 증여를 통해’ 성취되는 한 인격과의 친교와 일치를 다그치는 역할을 한다. 충동과 감정이 이 ‘의미’와 분열되어 있을 때 인간은 자신의 몸과 마음을 ‘숨기게 된다’(창세 3, 7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