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단상2>교리교육의 중요한 기준
페이지 정보
작성자 백인 세실리아 작성일20-05-27 14:38 조회1,812회 댓글0건관련링크
본문
<박찬희 신부 2>
성사를 얘기하기 위하여 먼저 요한복음 14장의 내용을 살피고 싶습니다. 그곳에서 필립보는 예수님께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하고 청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라고 답하십니다. 이 예수님의 말씀이 성사의 의미를 잘 드러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하느님의 모습을 드러내 보여주는 성사이십니다. 이처럼 성사는 우리가 희망하는 하느님과의 만남을 이루게 하여 줍니다.
원성사이셨던 예수님의 역할을 오늘날 교회에서는 예수님이 세우신 일곱 성사가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교회의 성사를 통하여 예수님의 참모습을 만나며, 그 예수님을 만남으로써 아버지 하느님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이렇게 하느님을 보고 만난다는 것, 이것은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 배우고 알아가는 교리교육과 그 의미를 같이 합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안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그 사람의 이름을 알고, 외모, 성격, 개인 정보 등등을 안다 하여도 그 사람을 한 번도 만나지 않았다면 우리는 그 사람을 안다고 얘기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안다는 것은 그 사람을 만나 서로 인사를 하고 함께 시간을 지내며 그렇게 관계를 맺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한 만남이 계속되어 서로 친해지고 가까워짐을 의미합니다.
하느님을 안다는 것 역시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안다는 것은 하느님이 어떠한 분이신지 성경과 교리를 읽으며 머리로 이해하는 것만으로 얘기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안다고 말하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가 하느님을 만나야만 합니다. 하느님과 함께 시간을 보내며 인격적인 관계를 만들어야만 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가르치신 방법 역시 그러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에는 예수님 말고도 많은 라삐, 스승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도 자기 제자들을 불러 자신이 아는 것을 가르치는 데 집중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가르침이란 단순한 지식의 전달에 머물렀을 것입니다. 이에 비해 예수님과 그 제자들의 모습은 달랐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가르침을 이해할만한 똑똑하고 지혜로운 이들을 찾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이 아니라 철부지 어린이들과 같은 이들, 고기 잡는 어부들을 부르십니다. 그들을 부르시면서도 ‘무엇을 배워라’ 하고 말씀하시기보다는 ‘와서 보아라’, ‘나를 따라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가르치신 방법은 무엇을 말씀하신 것만이 아니라, 그들과 함께 살아가는 것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만이 아니라 예수님의 삶의 모습 전체에서, 예수님을 보고 만나고 함께 살면서 그분이 누구이신지를, 그리고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배웠습니다.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초대에 우리도 함께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아는 방법은 당신이 세우신 성사 안에서 보고 만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교회의 성사를 거행하고 참여함으로써 하느님이 누구이신지를 진정으로 알게 됩니다.
따라서 교리교육의 두 번째 주제로 성사, 그리고 전례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저는 신자 여러분들께 먼저 성사에 참여하시라는 부탁을 드리고 싶습니다. 하느님을 알아가는 데 있어 단순히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하느님께 다가가 그분을 만나보라고 얘기하고 싶습니다. 그렇게 하느님을 만나보시면 여러분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에서 늘 갈망하시던 하느님의 사랑과 위로가 이미 우리 안에 함께 하고 있음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우리 교회의 일곱 성사에는 이러한 하느님 사랑의 모습이 풍부히 담겨 있습니다. 세례 성사에는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 새로운 삶으로 초대하시는 아버지의 모습이, 성체 성사에는 그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수난과 죽음, 부활을 이루신 예수님의 모습이 담겨 있습니다. 견진 성사에는 성령을 통하여 우리의 신앙을 견고하게 이끄시는 하느님이, 병자와 고해 성사에는 우리 삶에서 아프고 부족한 순간을 당신의 자비와 도움으로 채우시는 하느님이 계십니다. 그리고 혼인과 성품 성사에서는 우리가 서로 공동체를 이루어 살아가는 데 함께 하시며 우리 삶을 축복하시는 하느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이렇게 교회의 성사들에 참여하는 것은 그 안에 계시는 하느님을 만나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 성사들의 의미를 깨닫는 것은 하느님이 어떠한 분이시고,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알게 하여 줍니다.
그런 까닭으로 성사와 전례에 대한 교리교육이 우리에게 필요함을 말씀드립니다. 우리가 이미 받았고, 매일 드리는 이 성사들에서 우리는 하느님을 보고 만나기 때문입니다. 진정 우리에게 필요한 교리교육은 새로운 것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성사 안에서 늘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깨닫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늘 함께 하는 이 성사가 얼마나 큰 의미를 가지고 있었는지, 그 성사 안에 하느님께서 얼마나 아름답게 우리를 품고 계셨는지를 이제 여러분이 아셨으면 합니다.
우리는 삶에서 충분히 사랑받고 행복하면서도 이를 느끼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어쩌면 지금도 우리는 우리 삶의 가장 소중한 것을 잊은 채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멀리 둔 채로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이 시간이 지나면 그때 내가 몰랐던 것에 대하여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에 대하여도 마찬가지입니다. 성사와 전례가 가지고 있는 의미를 모른다하여 그 안의 은총이,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이 작아지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이 성사를 통하여 머물고만 있다면 하느님의 은총은 그 성사 자체로 우리에게 풍부히 주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성사 안에 계신 하느님의 모습을 알아볼 수 있다면, 그래서 이 성사를 통하여 하느님을 향한 우리의 믿음을 어떻게 기념하고 표현할 수 있을지 안다면 그 믿음은 우리에게 더 큰 기쁨으로 다가오리라 생각합니다.
사실 성사와 전례는 교리의 한 부분이 아니라 그 앞을 차지합니다. “기도하는 대로 믿는다.”는 옛 격언과 같이, 교회는 전례를 통하여 하느님을 만나고 이를 통하여 거룩한 전승을 구성해 왔습니다. 이러한 과정은 지금 우리에게도 필요합니다. 성사는 우리를 하느님을 보고 만나도록 초대하고 은총으로 이끌어 줍니다. 이는 교회 안의 모든 다양한 사람들에게 이미 주어진 은총이기에 감사드릴 일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은총을 우리가 깨닫고 합당하게 응답할 수 있다면 이것은 더 큰 신앙의 기쁨이 될 것입니다. 교리교육의 해에 성사를 통하여 만나게 된 하느님의 모습이 전례 교육을 통하여 합당한 응답이 되어 하느님을 향한 찬미와 감사의 기도로 이루어지기를 희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