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 첫 순교자 유해 발굴1[가톨릭신문 2021-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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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21-09-09 조회 4,586회본문
[한국교회 첫 순교자 유해 발굴] 경과와 의미
순교 230년 만에 발견… “신앙쇄신의 계기로 삼아야”
복자 유항검 묘지터 추정하고
무덤 개장 작업 중 유해 발견
전문가 참여 검증 작업 통해
유해 진정성 확인한 모범 사례
발행일2021-09-12 [제3261호, 10면]
■ 어떻게 찾았나
이번 유해 발견은 우연의 결과다. 바우배기 토지 매입을 위해 무연분묘를 개장하는 과정에서 찾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우연은 유해를 찾기 위한 수많은 노고와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특히 호남교회사연구소 명예소장 김진소 신부는 복자 유항검(아우구스티노)과 윤지충·권상연 복자의 무덤을 찾기 위해 40년 이상 현장을 답사하고 연구해왔다. 비록 김 신부가 순교자들의 유해를 직접 발견하지는 못했지만, 유해가 발견된 바우배기는 김 신부가 찾아낸 곳이다.
오랜 연구와 답사 끝에 김 신부는 1995년 10월 바우배기에 순교자의 무덤이 있을 것으로 추정했지만, 당시 발굴은 이뤄지지 못했다. 이후 2003년 초남이성지 초대 담당 김환철 신부가 김진소 신부의 연구와 현지 주민의 증언을 바탕으로 바우배기에 십자고상을 세웠다.
이번 유해 발견은 2020년 초남이성지 담당 김성봉 신부가 이 바우배기 부지를 매입하는 과정이서 이뤄졌다. 성지 측은 지난 3월 11일 국유지인 바우배기를 매입하기 위한 절차를 진행하면서 바우배기의 무연고분묘 10기를 개장했고, 개장 작업 중 복자들의 이름이 담긴 백자사발지석(白瓷沙鉢誌石)을 발견하면서 본격적인 검증 작업을 시작했다.
■ 철저한 과학적 검증
이번 유해 발굴 과정에서는 교구와 교회사 전문가를 비롯해 각계 전문가들과 연계한 치밀한 고증 작업과 과학적 검증 작업을 진행, 결과의 신뢰도를 높인 점이 눈길을 끈다. 단순히 기록이나 주장만으로 추정한 것이 아니라, 교회사학과 고고학, 의학, 과학 등 각 전문 분야의 지식과 기술을 총동원해 유해의 진정성을 확인한 모범적 사례라 할 수 있다.
호남교회사연구소를 비롯, 전문가로 구성된 연구진은 먼저 묘소의 정밀조사와 유물 연구를 실시했다. 무덤 출토물의 방사성탄소연대측정 결과는 1700년대 말에서 1800년대 초, 윤지충과 권상연이 순교한 1791년경에 해당했다. 백자사발지석의 명문 내용도 각각 윤지충과 권상연의 인적사항과 일치했다.
연구진은 동시에 유해의 해부학적 조사와 유전정보 연구도 진행했다. 이 해부학적 조사과정에서 윤지헌의 유해를 찾았다. 윤지충의 유해 다섯 번째 목뼈에서는 참수로 인한 손상을 발견했다. 나머지 8기의 유해 중 1기에서는 능지처참의 흔적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연구진은 이 유해가 윤지충의 유해와도 해부학적으로 유사함을 확인하고, 정밀조사를 통해 윤지헌의 유해임을 밝혔다.
유해 조사는 크게 치아 교묘도(마모 정도)와 골화도를 통한 연령검사, 해부학적 조사, Y염색체 부계확인검사(Y-STR)로 진행됐다.
각 유해들은 200년 이상 지났음에도 거의 온전한 상태로 남아 있어 나이와 성별, 키까지도 추정 가능했다. 그동안 발굴된 성인과 복자의 유해 중에서도 이렇게 온전한 상태로 보존된 유해는 드물다. 조사 결과 유해의 성별은 모두 남성이었고, 연령 역시 순교 당시의 나이와 부합했다. 키는 윤지충 165.2㎝, 권상연 152.5㎝, 윤지헌 163.9㎝가량으로 추정됐다.
이어 Y염색체 부계확인검사에서 윤지충과 윤지헌의 유해는 해남 윤씨 친족 남성 5명과, 권상연의 유해는 안동 권씨 친족 남성 5명의 유전정보와 일치한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유해 발굴과 조사 과정에 참여한 김진소 신부는 “역사는 과학적으로 검증되지 않으면 전설과 다름없다”며 과학적 검증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 첫 순교자의 유해
한국교회 첫 순교자들의 묘지와 유해 발견은 230년 만에 순교사의 첫 자리를 찾아낸 교회사적 사건이다. 동시에 유해 공경을 통한 신앙쇄신을 북돋우는 계기로서도 의미가 크다. 성 김대건(안드레아) 신부는 「조선 순교사와 순교자들에 관한 보고서」에서 윤지충과 권상연을 “조선의 첫 번째 순교자”로 기록했다. 또 중국 베이징교구 구베아 주교는 1794년 편지를 통해 “조선에서 두 순교자가 흘린 피는 씨가 돼 더 많은 신자들을 불러 모으며 풍성한 결실을 맺고 있다”고 기록한 바 있다. 그저 순교 순서만 처음인 것이 아니라 신자들이 그들을 공경해온 역사도 그만큼 긴 것이다.
전주교구장 김선태 주교는 특별담화문 ‘순교복자들의 유해 발견을 크게 기뻐하며’에서 “하느님께서 코로나 사태의 대재앙을 비롯해 여러 방면에서 심각한 위기를 겪고 있는 이 시대에 (순교자들의 유해를) 드러내신 뜻은 너무 분명하다”면서 “최초의 순교자들은 우리에게 하느님께 대한 철저한 신앙으로부터 우리의 삶을 다시 시작해야 한다고 웅변하고 계신다”고 신자들이 신앙의 본질에 충실할 것을 당부했다.
“하느님께서 보여주셨으니, 우리 몫을 할 차례”
“처음에는 기쁨보다 당황이 앞섰죠. 이곳에 순교자들의 유해나 유물이 있을 거라고 생각도 못했거든요.”
3월 11일 바우배기의 무덤 개장 작업을 하던 김성봉 신부(초남이성지 담당·사진)는 무덤에서 나온 백자 사발을 보고 당황했다. 눈에 먼저 들어온 ‘보록’(바오로)을 보고 ‘신자분의 유해인가 보다’ 했는데, 이어 보인 글자가 ‘지충’이었다.
김 신부의 마음은 ‘설마…’였다. 그런데 백자 사발의 글귀를 계속 읽어나가자 윤지충의 본(本) ‘해남’까지도 정확하게 볼 수 있었다. 심지어 다음 묘소에서는 권상연의 이름이 적힌 백자 사발까지 나왔다. 김 신부는 즉시 교구에 보고했다.
“왜 이곳에 계실까? 어떻게 이 일이 벌어졌을까?”
이토록 큰 발견이 있으리라 꿈에도 생각 못한 김 신부의 머릿속에서는 질문이 맴돌았다. 윤지충의 유해가 어떻게 해서 바우배기까지 왔는지를 알 수 있는 자료는 없다. 다만 김 신부는 “하느님이 복자들의 유해를 보여주셨고, 이제 우리 몫이 남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김 신부는 “이분들의 후손으로서 우리 몫을 해야 할 때인 것 같다”며 “이번 유해 발굴이 어떤 이벤트가 아니라 코로나19로 신앙이 희석되고 있는 지금, 신자들이 신앙을 쇄신할 수 있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고 밝혔다.
유해 발견 이후 김 신부는 성지에서 복자들을 현양할 수 있도록 준비하느라 여념이 없다. 앞으로 어떻게 성지를 조성할 것이냐는 질문에 김 신부는 “우선 주문모 신부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복자들을 기리는 성당을 짓고 싶다”고 답했다. 복자 주문모 신부는 유관검, 이존창과 함께 윤지충과 권상연의 무덤가를 지나면서 “이 무덤 위에 성당(천주당)을 세우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한 바 있다.
“우리나라 첫 순교자의 유해가 김대건 신부님 탄생 200주년을 기념하는 희년에 발견된 것에는 깊은 뜻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유해 발견이 우리의 신앙쇄신으로 이어져야 진정으로 그 의미가 있는 것 아닐까요.”
이승훈 기자 joseph@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