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 쉼터] 전주교구 설정 80주년 기념 제17회 ‘요안루갈다제’ 도보순례 열리던 날[가톨릭신문 2017-0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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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17-07-06본문
[가톨릭 쉼터] 전주교구 설정 80주년 기념 제17회 ‘요안루갈다제’ 도보순례 열리던 날
신앙선조 발자취 따라 걸으며 하느님 나라 여정 깨닫다
초남이~숲정이~치명자산성지
‘요안루갈다길’ 20㎞ 구간 순례
한국교회 세운 순교자 삶 묵상
발행일2017-06-04 [제3047호, 9면]
신유박해 200주년을 기념하며 시작된 전주교구 ‘요안루갈다제’. 프란치스코 교황이 광화문에서 복자로 선포한
124위의 순교자 중 유중철 요한(1779~1801)과 이순이 루갈다(1782~1802) 동정부부를 기리고자 마련된 축제다. 올해 17번째
열리는 요안루갈다제는 순교자들을 현양하는 축제의 장으로, 특히 올해는 교구 설정 80주년의 의미가 더해졌다. 그동안 교구에 베풀어주신 하느님의
은총에 보답하고 지역에 신앙의 씨앗을 뿌린 순교자들의 삶을 본받고자 특별강연과 도보성지순례 등 다양한 행사가 마련됐다. 지역 신자들의 설렘으로
가득찼던 도보순례 현장을 직접 찾았다.
5월 27일 오전 전북 완주군 이서면 농촌 마을. 햇볕은 강렬하지만, 선선한 바람이
산들거린다. 이른 모내기를 준비하는 농부는 들녘에 나와 구슬땀을 흘리며 농사일에 여념 없고, 벌써 모내기를 마친 논도 여럿
보인다.
일찍 찾아온 초여름 날씨로 바쁜 나날을 보내는 이 마을에 승합차와 버스들이 분주하게 오갔다. 마을 주변에 자리잡은 전주교구
초남이성지(담당 하태진 신부)에 신자들이 도보순례를 위해 속속 도착했기 때문이다. 간편한 복장의 신자들이 모처럼 만난 이들과 안부를 묻고,
담소를 나누면서 이내 훈훈한 분위기가 맴돌았다. 이어 초남이성지 담당 하태진 신부가 한 분 한 분 순교자들의 이름을 설명하며 ‘요안루갈다길’
해설에 나서자 신자들은 집중하는 모습이었다.
신자들은 본격적인 순례에 앞서 너도나도 채비를 점검했다. ‘천주교 전주교구’라고 적힌
순례 깃발을 가방에 매달고, 오후까지 이어질 순례를 준비했다. “새 교구장 주교님이 나셔서 올해는 두 분의 주교님과 함께 순례길을 걸을 수
있어서 너무 좋습니다.” 신자들은 입을 모았다.
오전 9시 교구장 김선태 주교와 전임 교구장 이병호 주교가 탄 버스가 성지에
도착했다. 교구에 또 한 번 큰잔치가 열린 듯, 신자들은 두 사목자를 반갑게 맞았다. 시작기도를 바치고 김선태 주교의 강복으로 도보순례가
시작됐다.
이날 도보순례는 동정부부가 살았던 초남이성지를 시작으로 동정부부와 복자 유항검(아우구스티노) 일가의 합장묘가 있는
치명자산성지까지 약 20km 구간을 걸었다. 신자들은 초남이성지를 출발해 농로를 따라 걸으며 본격적인 순례에 들어갔다. 전주 만성동성당에서 잠시
휴식을 하고 황방산을 넘어 전주천 인근 모롱지공원에 들러 점심식사를 함께했다.
오전 순례에 참가하지 못한 신자들은 모롱지공원에서
합류해 다음 순례지인 숲정이성지로 향했다. 전주천변을 따라 걸으며 이순이 루갈다가 순교한 숲정이성지로 걸음을 옮긴 신자들은 형장에서 순교한
신앙선조들의 삶을 묵상하는 시간을 가졌다. 이어 이날 순례의 종착지인 치명자산성지로 이동했다.
순례에 참가한 고충곤(바오로·전주
호성만수본당)씨는 “교구 설정 80주년과 124위 복자 기념일을 앞두고 주교님 두 분과 함께 ‘요안루갈다길’을 걷게 돼 기쁘다”며 “우리 교구민
모두가 이 길을 걸으며 ‘호남의 사도’ 유항검 일가의 삶을 묵상하고 신앙 안에서 가정, 생명, 사랑의 정신을 꽃피웠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순례 소요시간은 대략 8시간. 식사시간과 휴식시간을 빼면 5시간을 걷고 또 걸은 셈이다. 이날 순례에 돋보였던 점은
앞서거나 뒤쳐지는 신자들 없이 남녀노소 참가자들 모두가 밝은 표정으로 순례에 임했다는 점이다. 또 엄마 손을 잡고 참가한 어린이, 힘겨워하는
신자 옆에서 말동무를 자처하며 부축하며 걷는 신자들, 또 걸음을 옮기는 내내 묵주알을 돌리던 신자들도 보였다. 순례 중간중간에는 하태진 신부가
교회사 전반을 아우르면서 순교자와 관련된 설명을 해줘 더욱 유익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비록 이 딸자식이 죽는 지경에
이르러도, 너무 상심하여 주님의 각별하신 은혜를 배반하지 마시고, 부디 마음 편히 순명하십시오. 주님께서 다행히 저를 버리지 않으시고 치명의
은혜를 주시거든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십시오.”(복자 이순이 루갈다가 옥중에서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 내용 일부)
포졸들에게 붙잡혀
옥에 갇혀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치명의 은총을 간구한 이순이 루갈다. 그리고 굳건한 신앙으로 아내와 함께 기도와 묵상을 이어간 남편
유중철. 그는 이순이를 아내로 맞아 동정을 지키며 성가정의 모범을 보였다. 또 그의 아버지 복자 유항검(아우구스티노)은 당대 재력을 가진
양반이었음에도 영세한 뒤로는 빈부귀천 없이 자신의 것을 이웃에 나눴다. 종들에게도 애긍과 희사를 베풀며 하느님의 사랑을
실천했다.
이날 교구민이 함께 걸은 순례길은 전임 교구장 이병호 주교가 한국교회 첫 순교자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시복을 기념해 2015년 축복한 길이다. 수많은 순교자들은 칼날 앞에서도 하느님의 자녀라 당당히 밝히고 죽음을 택했다. 선교사 없이
한국교회를 세운 우리네 신앙선조들은 자신의 목숨보다 신앙을 우선에 두고 살았다. 한국교회를 세우고, 기틀을 세운 모든 순교자의 삶이
그러했다.
교구장 김선태 주교는 “우리 교회를 정의하자면 사제와 수도자, 신자들이 신앙으로 하나 되어 하느님 나라를 향해 나아가는
여정이라 말할 수 있다”며 “오늘 우리가 걸은 이 길 또한, 하느님 나라를 향한 여정 중에 하나”라고 강조했다. 이어 “각박한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 신앙인들이 무엇보다 신앙을 최우선으로 두고 살았던 신앙선조들의 삶을 되찾을 수 있기를 바란다”고
전했다.
박원희 기자 petersco@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