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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백합 제78호(가을) 신앙의 오솔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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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백인 세실리아 작성일22-08-24 15:19 조회42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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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왜 겁을 내느냐?”(마태 8,26)

 

불안의 증언자

노르웨이 화가 에드바르 뭉크Edvard Munch(1863-1944)의 가장 유명한 작품은 『절규』다. 이 작품은 하늘을 덮고 있는 혈홍색 구름을 배경 삼아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울부짖는 얼굴을 묘사하고 있는데, 한번 보면 쉽게 잊히지 않는다. 흐느적거리는 것 같은 자세는 마치 사람의 혼 자체를 연상시킨다. 그 혼은 대체 무엇을 절규하는 것일까?

뭉크는 공포와 불안에 크게 시달렸다고 한다. 1863년에 태어난 그는 유년기를 오슬로 크리스티아니아에서 보냈다. 그곳에서 그의 아버지가 의사로 자리를 잡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뭉크가 다섯 살이 되기도 전에 그의 어머니는 결핵으로 세상을 떠났다. 이때부터 어린 뭉크는 자신이 버림받았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누나 소피아가 그런 뭉크를 돌보았지만 역부족이었다. 게다가 아버지는 당시 종교적 망상에 빠졌다. 뭉크가 열세 살 되었을 때, 누이 소피아도 결핵으로 죽었다. 누이동생도 정신병에 걸렸고, 마침내 아버지와 남동생도 뭉크가 어렸을 때 세상을 떠났다.

이러한 이유로 죽음에 대한 공포와 불안은 그를 떠나지 않았다고 한다. 죽음의 공포를 이겨내려고 그는 끊임없이 그림을 그렸다. “나는 숨 쉬고 느끼고, 괴로워하고 사랑하는 사람 곧 살아있는 사람을 그리고 싶다.”고 그는 거듭 되뇌었다. 그는 자신의 작품을 전시하기 위해 긴 유럽 여행길에 올랐다. 그러다가 그만 알코올에 중독되었다고 한다. 이어서 그는 1908년에 무서운 신경성 강박증에 시달려 병원에서 여러 차례 치료를 받았다. 하지만 죽음의 불안과 강박관념이 계속 그를 짓눌렀다. 그는 1944년 80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뭉크는 오슬로 시市가 소유한 것만 해도 1,100점의 그림, 4,500여 점의 스케치, 18,000여 점의 인쇄물 등 엄청난 작품을 남겼다. 그는 자신의 고향에 엄청난 유산을 남겨준 셈이다. 표현주의의 개척자였던 그는 이렇게 말했다. “예술은 기쁨과 고통으로부터, 특히 고통으로부터 성장합니다. 예술은 나의 삶에 의미를 주었습니다. 예술을 통하여 나는 빛을 찾았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빛을 주기를 원합니다.” 뭉크의 작품은 불안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말이다. 

하지만 뭉크가 불안을 다룬 유일한 예술가는 아니다. 아일랜드 극작가 조지 버나드 쇼George Bernhard Shaw(1856-1950)도 불안을 다룬다. 그의 희극 『운명의 남자』는 주인공 나폴레옹과 신비스러운 ‘낯선 여인’ 사이의 대화를 전개한다.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그래, 당신은 불안에 대해 비웃을 수 있군요. 그렇다면 당신은 참된 불안이 무엇인지 아직 모르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나폴레옹은 대답한다. “그러니까 유일한 보편적인 충동 곧 불안이 있을 따름입니다. 인간이 지닐 수 있는 수많은 특성 가운데 유일한 특성은 불안입니다. 그것은 내 병사 가운데 북을 치는 가장 젊은이에게서만이 아니라 나에게도 찾을 수 있습니다. 불안은 사람을 전쟁터로 몰아넣습니다. 불안은 전쟁의 동기입니다. 불안! 나는 그것을 잘 압니다.” 인간은 불안을 떨쳐버리기 위해, 역설적으로 더 심한 불안의 장소를 선택한다는 뜻이다.

 

하느님은 우리 불안들을 알고 계시는가?

굳은 신뢰심으로 자신의 길을 꿋꿋하게 걷는 사람에게는 멀리서 막연하게 바라보는 사람보다 많은 것이 더 쉬워진다. 바로 이러한 체험을 어떤 두 친구가 분명하게 보여준다. 그들은 먼 여행길에 올랐는데, 도중에 많은 위험을 만났으며 진기한 일들도 겪었다. 한 번은 멀리서 믿을 수 없이 거대한 거인을 본 적이 있었다. 거인은 무시무시한 공포를 자아내는 모습을 보였다. 두 친구는 공포에 떨면서 거인에게 가까이 다가갔는데, 이런 결론을 내렸다. ‘우리가 그에게 가까이 다가설수록 그 위협적인 모습은 점점 작아졌습니다. 마침내 우리가 그 앞에 이르자마자 그는 보통 사람과 똑같았습니다.’ 그들의 마음은 한결 가벼워졌다.

우리의 삶에는 많은 거짓 거인이 있다. 우리가 대담하게 그 거인들에게 가까이 다가서면, 그들은 늘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 평범하게 보인다.

사실 불안은 우리 현존재가 피할 수 없는 운명과 같다. 불안은 우리 인간이 태어나 죽을 때까지 모든 여정에서 늘 우리와 동행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많은 불안을 이겨낼 수 있다. 그 원인을 찾아냄으로써 불안을 물리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특히 신뢰와 용기, 신앙과 사랑을 통해 불안에 가까이 다가섬으로써 그 불안을 물리칠 수 있다. 시편은 불안에 직면하여 하느님께 대한 굳은 믿음으로 이렇게 고백한다. “제가 비록 어둠의 골짜기를 간다 하여도 재앙을 두려워하지 않으리니 당신께서 저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시편 23,4) 이 말씀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어려운 상황에서 홀로 있다고 느낄 경우 불안에 빠질 수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면에서 예수님께서 함께 배를 타고 가던 제자들에게 “왜 겁을 내느냐?”(마태 8,26) 하고 제기하셨던 물음은 그 제자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이 물음은 모든 사람에게 제기된 것이다. 왜냐하면 불안에서 자유로운 사람이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불안을 겪을 때 우리에게 새롭게 떠오르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내가 도대체 누구이며 어디에서 왔는가라는 물음이다. 불안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존재로 불러내셨던 그 무無와의 만남이다. 예수님께서도 올리브 동산에서 당신의 죽음 곧 무無에 직면하여 불안에 떠셨다. 바로 이때 예수님께서는 당신 생애의 어떤 순간보다도 더 인간적으로 보이신다.

바로 이러한 점을 헤르만 헤세Hermann Karl Hesse(1877-1962)는 강조한 적이 있다. 그가 예수님께 이끌리고 깊이 감동했던 계기는 십자가에 달리신 모습도 광야에서 활동하시는 모습도, 기적을 행하시거나 부활하신 모습도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는 예수님께서 겟세마니 동산에서(마태 26,36-46 참조) 근심과 번민에 휩싸이신 모습에 감동을 받았다고 한다. 당시 예수님은 목전에 다가온 당신의 죽음에 대해 번민하셨고, 그러한 당신의 마음을 추스르기 위해 위로가 간절히 필요하여 제자들을 바라보셨다. 절망적인 외로움 속에서 약간의 온정과 인간적인 친밀함을 기대하셨지만 제자들은 태연하게 잠자고 있었다. “이런 두려운 순간은 어려서부터 어떻게 내 마음에 깊이 각인되어 왔는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예수님을 생각할 때마다 항상 이 순간의 기억이 즉시 떠오릅니다.”(헤세)

예수님께서 겟세마니에서 인간의 불안을 온전하게 체험하셨다는 것은 그분이 우리 인간과 똑같으신 분이심을 잘 보여준다. 그런데 그분이 호수 위 배 안에서 공포에 질린 제자들을 전혀 다르게 대하신 것(마태 8,23-27 참조)은 그분이 인간을 뛰어넘으시는 분임을 분명하게 드러낸다. 그분은 하느님에게서 오신 분이지 무無에서 오신 분이 아니시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불안을 두루 견뎌내시고 또 극복하셨기 때문에, 불안에 떠는 모든 인간은 그분께 나갈 수 있다. 그것도 그분만이 궁극적으로 나를 도우실 수 있다는 확고한 믿음으로 그분께 나갈 수 있다.

배 안에 계시던 그분은 그러한 극도의 곤경과 죽음의 공포에도 불구하고 전혀 동요하지 않으셨다. “그때에 호수에 큰 풍랑이 일어 배가 파도에 뒤덮이게 되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주무시고 계셨다.”(마태 8,24) 이렇게 전혀 동요하지 않는 모습, 아니 제자들의 위기 상황에 관심이 없어 보이는 이런 모습은 우리의 믿음을 방해하는 걸림돌 가운데 하나이다. 하느님께서는 정말 끔찍한 재앙, 비극적인 불행, 잔인한 범죄 등을 알고 계시는가? 어찌하여 이 세상에는 끊임없이 불행한 사태가 일어나는가?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겪고 있으며, 울부짖는 가운데 목숨을 잃고, 알려지지 않은 채 사라지고 있다. 이 모든 일이 하늘 아래에서 일어나는데, 하늘은 이에 대해 아무런 반응이 없다.

하느님께서 인간의 모든 곤경에 대해 관심을 두지 않거나 침묵하신다고 생각하는 우리의 태도를 예수님은 믿음이 약한 처사라고 질책하신다. 제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이런 질책에는 우리가 어떻게 불안을 극복할 수 있는지 그 비결이 감추어져 있다. 왜냐하면 약한 믿음과 불안은 서로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곧 믿음을 통해서만 불안을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믿음은 예수님과 함께할 경우 어떤 불행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신뢰, 곧 모든 위험에서도 결코 흔들리지 않는 신뢰를 뜻한다.

 

불안을 이겨내는 굳건한 신뢰

“너는 [불안의] 감옥을 사라지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니?” 이는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1853-1890)가 자기 동생 테오에게 제기한 물음이다. 고흐는 스스로 이렇게 답한다. “그것은 진지한 호의이지. 친구로 있는 것, 형제로 있는 것, 사랑하는 것 등은 강력한 마법처럼 불안을 사라지게 하지. 그러나 호의가 없는 사람은 죽음 속에 머물지.” 사실 사랑만이 불안을 덜어내고 생명과 자유의 길로 인도한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사랑을 믿는 사람에게 모든 것을 당신께 의탁함으로써 불안에서 벗어날 것을 요구하신다.

예수님께서는 매일 아침 우리를 당신의 배에 오르도록 초대하신다. 그래서 우리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그분과 함께 항해한다. 우리를 당황하게 하는 거친 상황들, 우리 일상에 덮치는 사나운 물결 등은 확고한 믿음이 불안을 실제로 극복할 수 있는지를 우리가 체험할 수 있는 순간들이다.

프랑스 극작가 앙드레 오베이André Obey(1892-1975)의 작품 『노아』는 확고한 믿음을 다루고 있다. 노아와 그의 아내, 세 아들과 세 며느리는 하느님께서 대홍수에서 자신을 지켜 주리라는 믿음으로 방주에 오른다. 그들에게 정말 완전한 믿음이 요구되었다는 것을 우리는 노아가 방주를 제작할 때 의식적으로 배의 키를 포기했다는 것에서 알 수 있다. 노아는 이렇게 생각했다. “하느님께서 우리의 생명을 지켜주신다면, 키가 없어도 상관이 없어야 한다. 하느님 자신과 그분께 대한 무조건적인 신뢰가 우리의 키여야 한다.”

그런 다음 홍수가 들이닥친다. 방주의 좁은 공간에는 노아와 그 아내, 세 아들과 세 며느리가 타고 있다. 불확실한 몇 주가 지난 후 노아와 그 아들 셈 사이에 갈등이 일어난다. 둘은 자신들의 불확실한 운명에 관한 해결 방안을 둘러싸고 서로 대립한다. 믿음이 없던 셈은 그러한 상황에서 무턱대고 기다려서는 안 되고, 무언가를 행동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는 먼저 돛단배를 만들기 시작했다. 노아는 아들 셈에게서 종교 환자로 비난받으면서도 하느님을 조건 없이 신뢰하며 그분께 모든 결정을 맡긴다. 그래서 방주의 동승자들은 절망에 사로잡힌 채 결국 노아에게 등을 돌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아는 항상 그들을 격려하고 위로한다. 과연 노아는 하느님께 대한 무조건적인 신뢰를 통하여 삶의 모든 불안을 떨쳐낸 위인이었다.

노아의 이러한 체험을 바탕으로 예언자 이사야는 하느님의 약속을 이렇게 선포한다. “나 너와 함께 있으니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의 하느님이니 겁내지 마라.”(이사 4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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