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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백합 제62호(가을)-신앙의 오솔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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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백인 세실리아 작성일18-09-04 09:38 조회1,97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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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결점을 어떻게 대하는가?

 

요한네스 타울러Johannes Tauler(1300-1361)는 중세의 신비주의자이며 유명한 설교가였다. 그는 특히 인간의 필사적인 노력에 항상 주목했다. 그러기에 우리가 소장하고 있는 그의 작품 84개의 설교와 강연은 신학적 사변이 아니라 종교적인 실천을 다루고 있다. 격동기에 살았던 요한 타울러는 노동과 오락의 세계에 깊이 빠져 있던 인간을 본래의 자리인 정신의 세계로 되돌려놓으려고 노력했다. 이를 위해 그는, 한편으로 인간을 세상의 일에서 벗어나게 하여 이로부터 내적으로 자유롭게 하려고 시도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이 자신의 삶을 하느님의 뜻에 일치시킴으로써 하느님 안에 온전히 머무르게 하려고 노력했다.
요한네스 타울러가 특히 대중에게서 호감을 얻었던 이유는 명석함 때문이다. 그의 주장은 항상 적절했고 명석했다. 그 명석함이 분명하게 드러나는 비유를 그의 여섯 번째 설교에서 찾아볼 수 있다. “말은 가축우리에서 분뇨를 만듭니다. 분뇨가 비록 더럽고 고약한 냄새를 풍길지라도, 그 말은 자신의 분뇨를 많은 수고를 들여 들판으로 옮겨 값진 거름으로 사용되게 합니다. 바로 이로부터 귀하고 아름다운 포도나무가 자라고, 달콤한 포도주가 나옵니다. 만일 분뇨가 거기에 없었다면 포도나무는 결코 그렇게 자라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제, 그대의 분뇨를 생각해 봅시다. 그것은 그대가 극복하지도 없애지도 못했고, 그래서 떼어놓을 수 없었던 그대의 결점을 뜻합니다. 이러한 결점은 그대가 자기 자신을 온전히 하느님께 내맡기는 수고와 노력을 통하여 자비로우신 하느님의 밭으로 옮겨집니다. 그대의 결점을 하느님의 밭에 뿌리십시오.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겸손하게 내어 맡기면 거기에서 귀하고 알찬 열매가 맺을 것입니다.”(『Predgiten』)
여기에서 주의해야 할 것이 하나 있다. 우리는 나의 결점과 잘못을 무조건 하느님께 내맡기기만 하면, 하느님께서 이를 완전하게 고쳐주신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이렇게 생각한다면, 우리는 타울러의 비유를 잘못 이해한 것이다. 물론 우리가 약점을 우리 자신의 힘으로는 궁극적으로 해결하지 못하며, 최종적인 것은 항상 하느님께서 이루신다고 생각하는 것이 옳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협력을 결코 배척하지 않으신다. 따라서 우리는 먼저 ‘수고와 노력으로’ 우리 자신에게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런 다음 이루어지지 않은 일들을 우리는 하느님께 서슴없이 내맡길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에게 물음이 제기된다. “나는 나의 결점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

어떤 사람이 자신의 결점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며 우리에게 찾아와 이렇게 말했다고 가정해보자. “나는 무언가를 시도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무엇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그에게 어떻게, 무엇을 조언해야 하는가? 다음과 같이 대답하면, 그에게 그리 나쁜 조언을 주는 것이 아닐 것이다. ‘먼저 그대가 원하는 것을 시작하기 바랍니다. 어쩌면 그대는 이기심에 가득한 사람일 것입니다. 그대는 그대 자신을 자주 잘못 대하고 있으며, 아마 반복하여 진리를 경솔하게 대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대 자신보다는 타인에게 무언가 더 많은 것을 요구하고, 그대가 시간을 정확히 지키지 않아 타인이 늘 기다려야 하는 불편을 겪을지도 모릅니다. 그대는 욕심이 과하고, 시기와 질투에 나약하고, 교만할 수도 있습니다. 게다가 다른 사람을 멸시하기도 합니다. 그대가 이런 사람일지라도 이제 무언가를 시작하기 바랍니다. 결정적인 것은 그대의 지금 상태가 아니라, 이제부터 질서 있는 삶을 살려는 그대의 진지하고 결정적인 의지입니다. 그런 의지를 실행하기 시작하면, 지금부터 그대의 삶 전체는 어떤 방식으로든지 변할 것입니다. 우리 인간의 삶은 서로 깊은 관련이 있는 부분들이 모아져 하나의 전체로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어떤 젊은 수도승이 생각난다. 어느 날 그는 나이 든 수도승을 찾아가 이렇게 물었다. “많은 생각들이 저를 이리저리 괴롭히는데, 어떻게 그것에 맞서야 하는지 저는 모르겠습니다. 제가 무엇을 해야 하나요?” 나이 든 수도승이 대답했다. “모든 것에 맞서지 말게. 오직 하나만 다루게. 하나를 이겨내면, 다른 것들도 극복할 수 있다네. 그것들에게는 모두 하나의 우두머리가 있다네.”(『Die Wüstenväter』)

영적 전통에 따라 자신의 결점을 다루는 데 도움이 되는 세 가지 규칙을 제시할 수 있다. 첫째는 고요한 침묵 가운데 하느님 앞에서 자신의 잘못을 명확하게 파악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쉽지 않다. 고요한 침묵을 지키는 것 자체가 어려울뿐더러 온갖 변명이 자꾸만 떠오르기 때문이다. 특히 자신의 개인적 잘못을 분명하게 파악하려고 할 때 더욱 그렇다. 하지만 자신의 잘못에 주목하지 않고, 그 잘못에서 자꾸만 멀리 달아나려고 시도할 경우, 우리는 그 잘못을 의식에서 떨쳐내어 무의식 속으로 밀어넣는 것과 같다. 그러면 우리의 내면은 온갖 잡동사니를 보관하는 창고가 되어, 그곳의 무질서가 어떤 방식으로든지 장차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위로 나타나게 된다. 이에 대해 아우구스티노는 이렇게 말한다. “희망이 없는 사람들도 자신의 죄에 무관심하면 할수록 타인의 죄에 더 많은 관심을 쏟아 넣습니다. 그들은 타인의 잘못을 고쳐 줄 마음으로 그 잘못을 찾는 것이 아니고 그것을 비판하려고 찾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 탓으로 돌릴 줄 모르고 타인의 잘못을 곧잘 나무랍니다. 이것은 다윗이 우리에게 보여 준 기도하는 법도 하느님과 화해하는 방법도 아닙니다. 다윗은 고백했습니다. ‘나는 내 죄를 알고 있사오며, 내 죄 항상 내 앞에 있습니다.’ 다윗은 다른 사람의 죄에 관심을 쏟지 않았습니다. 그는 마음의 눈을 자신에게로 돌려 겉으로가 아니라 내심으로 깊이 들어갔습니다. 그는 변명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용서를 청할 때 교만하게 청하지 않았습니다.”(성무일도서, 연중 제14주일 독서의 기도, 제2독서 참조)
자신의 잘못을 명확하게 깨닫기 위해 시간을 충분히 내는 사람은 더욱 혼란스럽고 공허하게 만드는 온갖 핑곗거리를 찾는 것을 곧바로 그만두기 시작한다. 그리고 타인에게 탓을 돌리거나 타인의 더 큰 잘못을 찾아 나서는 일도 중지한다. 그러는 사이에 자신의 내적인 불안과 동요가 서서히 사라지는 것을 느낀다. 그는 평온한 마음과 더불어 새로운 희망을 갖게 된다. ‘제대로 파악된 문제는 이미 거의 절반 해결한 것과 같다.’라는 말이 여기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그러기에 요한네스 타울러는 우리에게 80번째 설교에서 침묵 가운데 다음을 묵상하라고 권고한다. “그대는 주님께 그대의 삶을 모두 보여드리고, 그분만을 희망하기 바랍니다. 그분께서 좋게 만드실 것입니다.” 이어서 이렇게 결론을 내린다. “이 묵상의 첫 단계는 그대 잘못을 바라보고 그것을 참되고 깊게 깨닫는 것입니다. 하느님에게서 선택된 모든 친구는 이런 방식으로 시작합니다.”(『Predgiten』)

둘째 규칙은 그 잘못의 뿌리를 발견하는 것이다. 우리 인간은 항상 ‘~으로부터’ 행동한다. 행동에는 어떤 동기가 있다. 우리는 종종 우리의 잘못된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해 우리 자신은 물론 타인에게도 알맞은 동기를 부여하며 속인다. 우리의 내면을 있는 그대로 들여다볼 용기가 과연 우리에게 있는가? 모든 잘못과 윤리적 실패의 모든 뿌리에는 항상 우리의 이기심이 자리 잡고 있다고 말할 수 있지 않는가? 무언가를 포기하거나 감수해야 한다는 것에 우리는 두려움을 느낀다. 그러기에 우리는 그것을 피하는 도구와 방법을 늘 찾는다. 그런 다음 우리가 자주 느끼는 것은 점점 외롭다는 것이다. 여기서 문제가 제기된다. 어떻게 나는 이기심의 이런저런 모습을 제대로 다스리는 주인이 되며, 어떻게 나는 내적으로 넓고 자유롭게 되는가?
이에 대해 스위스 심리학자 융C. G. Jung(1875-1961)의 말은 우리에게 좋은 대답을 준다. 그는 자기 환자들 가운데 몇몇이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극복했던 일을 이야기했는데, 환자들은 새로운 의식의 지평을 발견함으로써 그 문제에서 빠져나왔다는 것이다. “더 높고 더 넓은 어떤 흥미가 시야에 들어왔습니다. 지평의 이런 확대를 통하여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그 절박성을 잃었습니다. 문제가 스스로 논리적으로 해결된 것이 아니라, 삶에 대한 더 강한 새로운 방향을 마주함으로써 점차 사라진 것입니다.”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관심이다. 곧 자기 자아에 대한 관심보다 더 높고 더 넓은 관심이 필요하다. 이런 관심에 다다르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을 조금 멀리하고 이웃이나 하느님을 높이 우러러 보아야 한다. 우리가 인격적으로 다가설 수 있는 이웃이 우리에게 정말 있기나 한가! 하느님께서는 항상 우리를 위해 존재하신다!

셋째 규칙은 새로운 삶의 방향으로 나가는 결정에 이르게 되면, 그 결정이 하찮은 것일지라도 실제로 곧장 실행하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결정의 실행을 망설이지 말고, 다시 숙고하지 말라는 것이다. 조심스럽게 숙고하여 결정에 이르면, 그것을 실제로 가차 없이 그리고 지혜롭게 실행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다시 머뭇거리고, 또다시 이전의 잘못에 이르게 된다.
아울러 우리가 명심해야 할 또 한 가지는,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고 실행할 경우, 부정적인 생각을 아예 멀리하는 단호한 마음가짐이다. 어떤 사람이 ‘나는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하는데, 종국에는 그것을 끝낼 수 없을 것이다.’라고 부정적으로 생각한다면, 그 계획을 곧장 포기하는 것과 같다. 이에 비해 그가 처음부터 ‘이것은 오늘부터 이미 시작되었다. 이에 대해 더 이상 논의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면, 그리고 항상 그렇게 단호하게 마음속으로 다짐한다면, 그는 전진한다. 예수님을 추종하는 사람들은 그분께서 보여주셨던 확고한 결정 능력을 자신의 것으로 삼아야 한다. 곧 쟁기를 손에 대고 뒤를 돌아다 보지 않고 앞만을 바라보고 나가야 한다.

우리는 가끔 이렇게 말한다. “지금 우리는 인생의 험한 산을 넘어서고 있다. 이제 드디어 위험에서 해방되었다.” 하지만 얼마 후에 “모든 것이 다시 이전과 똑같이 되었다.” 라고 확인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인간의 성숙은 결코 일직선상이 아니라 나선형의 모습으로 이루어진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에게 늘 새롭게 용기를 북돋아주는 짧은 말씀이 있다. 그것은 『준주성범』에 나오는 “늘 다시 시작하라!”Semper incipe!는 말씀이다.
이 말씀은 지상에 사는 우리 현존재의 실재와 일치한다. 우리는 항상 반복하여 시작해야 한다. 곧 매일 아침, 매주, 매년, 새로운 인생단계의 시작 등에서 항상 시작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가 상처를 입었을 때, 실망할 때와 운명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을 때 늘 다시 시작해야 한다. 실패한 후에, 죄를 지은 후에도 항상 다시 시작할 수 있다. “우리가 이렇게 자주 시작해야 하는 것은 슬픈 일이다. 우리가 그렇게 종종 시작할 수 있다는 것은 위로가 된다.”(P. Redlich). 하느님께서는 죄를 범하는 우리의 마음보다 더 크시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결점과 잘못, 배반과 죄악 등을 무한하신 하느님 인내의 밭에 온전히 내맡길 수 있다. 나약하고 허약한 사람들의 친구이신 그분은 우리에게 용서와 새롭게 시작할 힘을 베풀어주시고, 우리의 부족함에서 거룩한 무언가를 돋아나게 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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