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모음

글모음

쌍백합 제63호(겨울) 신앙의 오솔길

페이지 정보

작성자 백인 세실리아 작성일18-11-30 15:09 조회1,983회 댓글0건

SNS 공유하기

본문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소서!”

 

 

1.주님의 기도에는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소서!”라는 청원이 있다. 이 청원은 하느님의 뜻이 너무도 이루어지지 않는 어두운 이 세상을 전제하고 있다. 실제로 언론매체를 통해 날마다 접하게 되는 전쟁, 고문, 착취, 억압, 어린이 학대 등 각종 폭력 사건은 하느님의 뜻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하지만 우리의 외적 세계만이 그런 것이 아니다.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은 우리의 내적 세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이기적인 욕심은 우리 마음속에서 온갖 시끄러운 소리를 내고 있으며,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위로 이루어지는 것은 많은 부분 하느님의 뜻과 어긋난다. 하느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여시기 위해 그 문의 손잡이를 아래로 내리신다면, 우리 인간은 힘주어 그 손잡이를 위로 올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우리가 겪는 고통은 대부분 하느님의 뜻을 거역함으로써 비롯되는 것인데, 이는 우리의 의지로 거역한 것이 아닌가! 

 

2.믿음의 완성자이신 예수님을 바라보자. 지금까지 예수님처럼 하느님의 뜻을 명료하게 깨닫고 완수했던 사람은 없었다. 앞으로도 아마 없을 것이다. 루카복음은 예수님께서 열두 살 때에 예루살렘 성전에 방문하셨을 당시 있었던 사건을 전해준다(루카 2,41 이하). 예수님의 부모가 그분을 애타게 찾다가 마침내 찾아냈을 때 예수님께서는 놀랍게도 이렇게 말씀하셨다.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 여기에서 예수님께서는 ‘필연성’을 말씀하신다. 곧 성전에서 이것저것을 구경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반드시’ 이행하는 것이 당신의 사명임을 밝히신다.
요한복음이 전하는 사마리아 여인의 한 대목을 생각할 수 있다(요한 4,1 이하). 여행에 지치신 예수님께서는 야곱의 우물가에 앉으셨다. 제자들은 먹을 것을 사러 고을에 갔다. 우물가에 계신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 여자를 만나 대화를 나누셨는데, 이 대화를 통해 사마리아 여자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 제자들은 돌아와 여자와 이야기하시는 예수님께 이렇게 말했다. “스승님, 잡수십시오.” 그러나 예수님께서 “나에게는 너희가 모르는 먹을 양식이 있다.” 하시자, 제자들은 “누가 스승님께 잡수실 것을 갖다 드리기라도 하였다는 말인가?”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다. “내 양식은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고, 그분의 일을 완수하는 것이다.”
목마름과 배고픔은 우리 인간이 일상생활에서 자주 느끼는 욕구이다. 하지만 이런 외적인 목마름과 배고픔 이면에는 참되고 영원한 충만을 향한 갈망 곧 영원한 생명을 향한 갈증과 허기가 자리 잡고 있다. 이와 상응하게 예수님께서는 바로 아버지의 뜻을 행함으로써 당신의 목마름과 배고픔이 채워진다고 말씀하신다.
마르코복음이 우리에게 전해주는 또 다른 사건은 더 근본적이다(마르 3,31 이하). 예수님께서는 집 안에서 당신을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계셨다. 사람들이 그분께 말한다. “보십시오.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과 누이들이 밖에서 스승님을 찾고 계십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누가 내 어머니이고 내 형제들이냐?” 하고 반문하시며,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하고 이르셨다. 이로써 예수님께서는 근본적으로 이렇게 선언하시는 것과 같다.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 바로 나의 참된 가족이다.’
앞에서 거론한 성경의 세 대목에서 우리는 이런 결론을 내릴 수 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은 예수님께서 생각하시고 말씀하시고 행동하시는 중심이다. 아버지의 뜻은 예수님의 행동 전체의 근원이다. 하느님의 뜻은 예수님을 통해 이 세상에 점점 실현되어 영원한 생명을 가져다주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뜻이 아니라 오직 아버지의 뜻을 행하심으로써, 완전하게 하느님 아버지의 아들이 되신다. 예수님께서는 가장 본질적인 것 곧 사랑을 완성하신다.

 

3.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쳐주셨던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소서.’의 기도는 다른 많은 기도들 가운데 하나가 아니다. 이 기도는 오히려 예수님의 삶을 형성하는 원음原音이요 그분의 삶을 지배하는 원리原理이다. 이것은 특히 겟세마니에서 드린 예수님의 기도에서 잘 드러난다. “아버지, 아버지께서 원하시면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십시오.”(루카 22,42) 아버지의 뜻에 자신의 모든 것을 내맡기는 것, 이것은 예수님께서 드리신 가장 깊은 기도이다.
예수님의 이러한 자세는 이스라엘 백성이 추구한 이상理想과 온전하게 부합한다. 그 구체적인 실례로 시편 119편을 들 수 있다. 시편 119편에서 우리는, 하느님께서 순종을 요구하실 경우 이스라엘 백성은 망설이거나 주저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곧바로 벅찬 기쁨을 누렸던 것을 알 수 있다. 이 시편에서 사랑과 기쁨이란 단어가 자주 나타나는 것을 우리는 확인할 수 있다. 그러니까 하느님의 뜻에 전적으로 복종하는 순종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첫 번째 의무이자 최상의 기쁨이었고, 참된 자유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었던 것이다.

 

4.이제 우리가 주목하고 싶은 것은,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소서.’라는 청원이 다양한 맥락에서 표명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청원이 그때마다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는, 이 청원이 표명되는 상황이나 어투에서 알 수 있다.
먼저 이 청원은 어쩔 수 없이 분노하며 불쾌한 상태로 표현될 수 있다. 이 경우 청원자는 하느님의 뜻에 반드시 복종해야 하는 것을 분명하게 알고 있지만, 실제로는 그 복종을 마지막 순간까지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이웃의 잘못을 용서하는 것이 하느님의 뜻임을 알고 있지만, 용서를 끝까지 거부하고 분노와 증오심에 가득한 채 마지못해 주님의 기도를 바치는 경우가 그것이다.
그리고 이 청원기도는 체념의 어조로 바칠 수 있다. 이 경우 청원자는 자신의 패배를 스스로 고백하는 것과 같다. 361년부터 로마 황제였던 율리아누스(331/32-363)는 그리스도교를 로마의 종교로 받아들인 콘스탄티우스 황제의 결정을 번복하려고 시도했다. 그리고 옛 우상들에 관한 예배와 의식형태를 다시 부흥시키려고 감행했다. 그러나 그는 결국 전쟁터에서 창에 맞아 목숨을 잃었다. 역사가들은 땅바닥에 쓰러져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율리아누스 황제가 예수님을 지칭하며 이렇게 말했다고 전한다. “갈릴래아 사람인 그대가 승리했군!” 이 말로 율리아누스 황제가 예수님께 복종한 것은 결코 아니다. 그 황제가 달리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에, 그는 마지못해 자신의 실패를 시인한 것이다.
하지만 주님의 기도는 솔직하고 신뢰가 가득한 사랑의 마음으로 바칠 수 있다. 이 경우 청원자는 하느님께서 당신 자녀의 눈물을 닦아주신다고 확신하며 기도한다. 설령 당신 자녀가 눈물을 흘리게 하실지라도 결코 무의미하게 흘리게 하시지 않는다는 것을 확신하며 기도한다. 하느님께서 갑자기 우리 삶에 개입하시거나 무언가를 요구하실 경우 힘겹고 부담스러운 것은 사실이지만, 그래도 신뢰하는 마음으로 하느님의 뜻을 전적으로 받아들인다.
어떤 랍비는 제자에게 단호하게 이렇게 말했다. “표범처럼 대담하게, 독수리처럼 가볍게, 사슴처럼 빠르게, 사자처럼 강하게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행하라.”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사람은 대담하고, 가볍고, 빠르고, 강인해야 한다.

 

5.마지막으로 우리가 반드시 한 번쯤 생각해야 할 물음을 다루어보자. 하느님의 뜻에 순명하며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소서.’하고 기도하는 것이 우리에게는 왜 그리 어려운가? 우리가 이 물음에 대해 진지하게 다룰 경우, 정직하게 이렇게 대답해야 할 것이다. ‘우리 삶에 가장 합당한 것이 도대체 무엇인지에 대해, 우리의 마음 깊은 곳에서는 우리 인간이 하느님보다 잘 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길을 선호한다. 그 길이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길보다 더 낫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널리 알려진 하느님의 두 가지 특성을 등한시한 결과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 두 가지 특성을 살펴보자.

 

6.첫째 특성은 우리가 신앙으로 고백하는 하느님의 지혜이다. 행복한 삶이 갑자기 무너질 때마다 인간은 늘 반복하여 ‘도대체 왜 우리가 이런 일을 당하는가?’ 하고 묻는다. 그리고 우리는 ‘왜?’라고 묻는 기회를 일상에서 날마다 갖기도 한다. 신문을 보는 것만으로도 그런 기회를 갖기에 충분하다.
성경도 ‘도대체 왜?’라는 우리의 물음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갖고, 부지기수로 대답하려고 시도했다. 그때마다 성경은 우리의 시선을 하느님의 생각과 계획 곧 하느님의 지혜에 돌린다. 예컨대 우리는 유딧기에서 이렇게 확인할 수 있다. “여러분은 사람 마음의 깊은 곳을 찾아내지도 못하(…)십니다. 그러면서 어떻게 (…) 하느님을 세밀히 살펴보시고 그분의 생각을 알아내시며 그분의 계획을 헤아리실 수 있다는 말입니까?”(유딧 8,14) 같은 시각에서 이사야 예언자도 말한다.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같지 않고 너희 길은 내 길과 같지 않다. 주님의 말씀이다. 하늘이 땅 위에 드높이 있듯이 내 길은 너희 길 위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 위에 드높이 있다.”(이사 55,8-9)
‘도대체 왜?’ 하고 묻는 사람이 마음의 진정을 찾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 인간이 온전히 헤아릴 수 없는 하느님의 생각과 지혜를 기꺼이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하느님의 생각과 계획이 우리의 것보다 선하고 완전하다고 확고하게 신뢰해야 한다. 이렇게 하느님의 지혜를 인정하고 신뢰하는 사람은 마침내 단 하나의 간청을 가지게 된다. 그것은 어떤 경우에도, 그 무엇을 통해서도 하느님께 대한 신뢰가 무너지지 않기를 바라는 간청이다. 우리는 대부분 헤아릴 수 없는 하느님의 뜻을 뒤늦게 서서히 깨닫기 때문이다.
우리 인간은 주로 현재의 순간을 인지하는 반면,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포함한 삶의 여정 전체를 두루 바라보신다. 이것을 스토아 철학자들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하느님께서 어떤 운명이 아니라 통찰이시며, 그분의 모든 행동은 인간의 선익을 목적으로 행하신다고 가르쳤다. 그러기에 에픽테토스는 이렇게 기도했다. “장차 당신께서 원하시는 대로 저를 마음껏 하시기 바랍니다. 저는 당신과 뜻을 같이 하나이다. 저는 온전히 당신의 것입니다. 저는 당신 마음에 드는 것을 아무것도 피하고 싶지 않나이다. 당신께서 원하시는 곳으로 저를 인도하소서. 당신께서 원하시는 옷을 입혀주소서.”

 

7.우리가 간과하지 말아야 하는 하느님의 두 번째 특성은, 그분의 사랑이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인간을 극진히 사랑하신다. 역사의 모든 사건은 하느님의 사랑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 때때로 천재지변이나 비참하고 끔찍한 고통 등의 사건에서 하느님의 사랑은 물론 그분의 존재마저 의심스럽게 되지만, 그런 참혹한 고통 뒤에 우리에게 아직 알려지지 않은 하느님의 의향을 헤아리는 것이 중요하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인간에게 항상 더 좋은 것을 주시기를 원하시고, 그런 의미에서 고통을 허용하시기 때문이다. 요한 23세 교황은 자신의 죽음을 생각하며 이렇게 확신하였다. 곧 주님께서는 당신 자녀에게 더 확실하고 더 위대한 기쁨을 마련하시는 일이 아니라면, 당신 자녀가 지금 누리는 기쁨을 결코 방해하지 않으신다고 확신하였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분명히 사랑하심을 확신하며, 지금 겪고 있는 고통도 하느님의 사랑에서 이해했던 것이다.

 

8.이렇게 하느님의 두 가지 특성, 헤아릴 수 없는 그분의 지혜와 심오한 사랑을 받아들이면, 우리 자신의 길을 고집하지 않고 하느님의 길을 걸을 수 있다.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소서.’ 하고 진정으로 기도할 수 있다. 그리고 에르네스토 카르데날Ernesto Cardenal과 함께 이렇게 고백할 날이 올 것이다. “우리가 우리의 생각을 하느님의 뜻에 복종시키면, 사소한 모든 것 곧 길거리에서의 모든 만남, 모든 전화통화, 모든 편지 등이 갑자기 의미를 지니게 된다. 그러면 우리는 모든 것이 하나의 바탕을 지니고 있으며, 모든 것은 하나의 섭리에 복종하고 있음을 체험한다.”​

 


Warning: Use of undefined constant php - assumed 'php' (this will throw an Error in a future version of PHP) in /home/jcatholic/www/skin/board/bishopkim/view.skin.php on line 16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