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백합 제65호(여름) 신앙의 오솔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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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백인 세실리아 작성일19-05-29 16:38 조회1,895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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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사람에게는 십자가가 있다"
1.하느님의 특이한 길
아르스의 성자 요한 마리아 비안네Jean-Marie Vianney(1786-1859)는 성인 가운데 특별한 사랑을 받는 분이다. 성인은 리옹 근교에서 태어났고, 아버지는 소작인이었으며 19세에 이를 때까지 아버지를 도왔다. 그 후에 사제성소를 받고서 성인은 먼저 나이어린 소년들과 함께 학교에서 산수, 역사, 지리, 라틴어들을 배워야 했다. 이 배움의 길이 성인에게는 무척 힘들었다. 모든 사람이 성인을 완전한 바보라고 생각할 정도였다.
이어 성인은 신학교에 입학했다. 여기에서도 성인은, 스스로 말했던 것처럼 “적지 않게” 고통을 겪어야 했다. 성인은 나이가 가장 많았지만, 가장 좋지 않은 학생으로 알려졌다. 때문에 신학교를 떠나라는 요구를 받기도 했다. 이때 성인의 첫 스승 발레리M. Balley 사제가 개인교습으로 성인을 도왔다. 시험에 떨어진 성인은 재시再試에 통과한 다음, 결국 하느님의 은총과 자비로 1815년 8월에 사제품에 올랐다.
참으로 기이한 것은, 많은 사람들이 성인이 사제가 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지만 어느 날 교회에 의해 모든 본당 사제의 모범과 수호성인으로 선포되었다는 점이다. 성인의 이런 신비스런 생애에 대해 의아스럽게 생각하는 사람은 그 답을 성인이 자기 공동체에 언급했던 다음 몇 마디 말에서 찾을 수 있다. “십자가는 우리가 읽을 수 있는 가장 훌륭한 책입니다. 이 책을 모르는 사람은 다른 모든 책을 읽었을지라도 무지합니다. 정말 현명한 사람은 이 책을 사랑하고, 이 책에서 조언을 찾고, 이 책을 탐구하는 사람입니다. 십자가에 가까이 다가설수록, 십자가 앞에 더욱 머물고 싶을 것입니다.”
성인의 생애 전체는 인간과 함께 하는 하느님의 특이한 길 곧 십자가의 길을 묵상하도록 재촉한다. 그런데 우리 인간이 이런 길을 얼마나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지는 다음 격언으로 표현할 수 있다. “인간은 계획하고, 하느님께서 이끄신다.” 이를 포르투갈의 격언은 이렇게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굽은 선 위에서도 글을 바르게 쓰신다.” 이런 격언의 표현보다 비할 데 없이 더 깊은 감동을 주는 표현은 로마서의 옛 찬미가이다. 이 찬미가도 궁극적으로는 인간과 함께 하는 하느님의 특이한 길을 겨냥하고 있다. “오! 하느님의 풍요와 지혜와 지식은 정녕 깊습니다. 그분의 판단은 얼마나 헤아리기 어렵고 그분의 길은 얼마나 알아내기 어렵습니까? 누가 주님의 생각을 안 적이 있습니까? 아니면 누가 그분의 조언자가 된 적이 있습니까?”(로마 11,33-34)
2.하느님의 길은 항상 십자가의 길이다.
인간이 많은 것을 계획하지만 하느님께서 이끌어주시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으며, 그리고 하느님의 그 인도하심도 늘 십자가를 통해 이루어진다는 것을 우리 역시 가끔 체험하고 있지 않는가? 이런 체험을 깊이 의식하는 사람은 자신의 신앙을 새롭게 할 수 있다. 곧 이전보다 더 진지하고 더 결정적으로 자신의 삶을 하느님의 손길에 내맡기고, 늘 하느님과 함께 하는 삶을 새롭게 시작할 수 있다. 이런 일은 아주 단순해 보이지만, 실상 우리 인간이 실현할 수 있는 일 가운데 가장 어려운 일이다. 그 이유는 하느님의 길이 항상 십자가의 길이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느님의 길에 자기 자신을 내맡기는 일이 두려운 나머지 주춤거린다. 오히려 자신이 계획한 길을 걷기를 원한다.
하지만 이전이나 이후에나 분명히 드러나는 것은 자신의 길이 ‘그릇된 길’ 외에 다른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릇된 길은 무엇인가? “나무는 숲의 다른 이름이다. 숲에는 대개 개간되지 않아 갑자기 끊어지는 길들이 있다. 그것이 바로 숲길Holzwege(‘그릇된 길’로 의역할 수 있음)이다.” 이런 말로 철학자 하이데거Martin Heidegger(1889-1976)는 자기 작품 『숲길Holzwege』을 시작한다. 따라서 숲길은 곧장 빽빽한 숲에서 출구 없이 끝나는 미로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숲길”과 “십자가의 길”, 우리의 길과 하느님의 길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언제나 요구된다.
그런데 왜 십자가의 길만이 이 세상에서 우리 현존재와 어울리는 것인가? 그 이유는 십자가를 짊어지지 않은 사람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에게는 십자가가 있다. 비록 십자가가 없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일지라도, 십자가가 있다. 따라서 조금 더 정확하게 우리는 이렇게 말해야 한다. ‘모든 사람에게는 자기 십자가가 있다. 곧 모든 사람은 각자 자신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십자가를 짊어지고 있다.’
이를 구체적으로 설명해주는 오래된 전설이 있다. 어떤 사람이 자신의 십자가에 대해 하느님께 불평을 늘어놓았다. 그러자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이 짊어지고 있는 모든 십자가를 모아놓은 큰 방으로 그를 데리고 가시어 자신의 십자가를 내려놓게 한 후, 원하는 십자가를 선택하게 하셨다. 그는 자기 마음에 드는 십자가를 찾기 시작하였다. 한쪽에서 얇은 십자가가 그의 눈에 띄었지만 다른 것보다 더 길었다. 다른 한쪽에서 그는 작은 십자가를 보았지만 납처럼 무거운 점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런 다음 마음에 드는 십자가를 발견했는데, 거기에는 어깨에 메는 십자가의 부위가 마치 가시처럼 날카롭고 뾰족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완전히 그의 마음에 드는 십자가를 발견하기까지는 상당히 긴 시간이 필요했다. 마침내 그는 마음에 쏙 드는 십자가를 발견했을 때 속으로 이렇게 말했다. “바로 이 십자가다. 내가 짊어지기에 가장 좋은 십자가다.” 이렇게 속으로 말하고 나서 곧장 그는 자신의 눈을 의심하였다. 그 십자가는 지금까지 자신이 짊어지던 십자가였고, 이제까지 그는 그렇게 고백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 전설이 우리에게 말하는 것은 무엇인가? 내가 종종 이해할 수 없었고, 그래서 짊어지기를 마다하였던 십자가가 바로 나에게 가장 적합한 십자가라는 것이다. 나에게 맡겨진 십자가에 대해 나는 어떤 입장을 취하는가? 세 가지 입장을 취할 수 있다. 첫째, 나는 주어진 내 십자가를 거절할 수 있다. 그러나 주어진 자신의 십자가를 마다하는 사람은 틀림없이 더 어울리지 않는 다른 십자가를 분명 만날 것이다. 둘째, 나는 주어진 내 십자가를 마지못해 짊어질 수 있다. 자신의 십자가를 어쩔 수 없이 짊어지는 사람은 십자가를 더욱 무겁게 짊어질 뿐이다. 셋째, 나는 주어진 내 십자가를 기쁘게 짊어질 수 있다. 자신의 십자가를 기꺼이 짊어지고 기쁘게 사는 사람은, 그 십자가가 자기 자신을 짊어지고 있다는 것을 체험할 것이다. 그의 인생 전체는 십자가의 길이 된다. 그리고 그 십자가 길은 틀림없이 그 자신을 점점 하느님께 가까이 인도할 것이다.
3.십자가를 기쁘게 받아들이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그러면, 주어진 십자가를 기쁘게 받아들이는 방법은 무엇인가? 그 해답을 우리는 개신교 신학자 발터 우사델Walter Uhsadel이 1938년에 유명한 스위스 심리학자 칼 구스타프 융Carl Gustav Jung과 나눈 짧은 대화에서 찾을 수 있다. 융은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묘사하고 있는 교회의 스테인드글라스를 가리키며 이렇게 말했다. “이것이 바로 우리에게 결정적인 것입니다.” 신학자가 그렇게 말하는 이유가 도대체 무엇이냐고 묻자, 융은 이렇게 대답했다. “저는 지금 인도에서 돌아옵니다. 저에게는 방금 이런 새로운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인간은 고통의 문제를 반드시 해결해야 합니다. … 고통은 꼭 극복되어야 하고, 그것을 극복하는 방법은 오직 하나 곧 그것을 짊어지는 방법뿐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오직 그분에게서 배웁니다.” 융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이야기한 것이다. 그러니까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볼 때, 우리는 자신의 십자가를 기꺼이 받아들이고 짊어지는 것을 배우고, 마침내 십자가에 의해 우리의 삶 전체가 지탱되고 있음을 배운다는 것이다.
하지만 결정적인 내용이 아직 언급되지 않았다. 결정적인 내용을 우리가 깨닫기 위해서는 먼저 아르스의 성자처럼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읽을 수 있는 책 가운데 가장 훌륭한 책으로 받아들일 경우이다. 그리고 우리가 늘 십자가에서 조언을 구하고, 십자가의 신비를 깊이 헤아리기 위해 십자가에 가까이 할 경우이다. 그러면 십자가는 우리의 존재를 신앙의 근본에까지 인도할 것이다.
이때 십자가에서 예수님께서는 아마 우리에게 이렇게 말할 것이다. ‘네가 어둠속에 있을 때, 외로움에 사무칠 때, 내적인 공허에 신음할 때, 극복할 수 없는 어려움에 직면했을 때, 이별, 절망, 환멸, 불의 등이 너를 괴롭힐 때, 힘든 일이나 무거운 죄가 너를 짓누를 때, 그 모든 것을 내가 늘 십자가를 통해서 내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인다. 그 모든 것을 내가 직접 짊어지고 변화시킨다. 그러니 너는, 설령 너를 억누르거나 질식시킬 수 있는 것이 네게 있더라도, 네 내적 공허와 환멸, 고통과 어려움 등 네 죄악이 네 자신을 괴롭히더라도, 항상 나의 영원한 사랑에 에워싸여 있는 것이다. 나는 두 팔을 활짝 벌린 채 네 앞에 서 있다. 그러기에 너는 십자가에 달린 내 앞에서 아무것도 억압할 필요가 없으며, 아무것도 무시할 필요가 없으며, 아무것도 변명할 필요가 없으며, 네 삶에서 아무것도 부끄러워 할 필요가 없다. 너에게는 오직 한 가지만 필요하다. 그것은 무조건적인 신뢰이다. 그 신뢰에 힘입어 너는 깨어지고 상처입기 쉬운, 보잘것없는 네 작은 “자아”를 무한한 “나”에게 내맡겨라. 나는 바로 널 위해 십자가에 달려 있다. 네가 모든 것을 더 이상 “네 자신”이 아니라 “나”에게 내맡기는 순간, 네 무거운 짐은 너를 더 이상 짓누르지 못할 것이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에게 세 가지 내용을 묻는다. 첫째, 지금까지 내 삶의 길은 어떻게 보이는가? 그것은 그릇된 길인가 아니면 십자가의 길인가? 둘째, 내 방 안에 걸려 있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나의 삶에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가? 나는 십자가와 과연 개인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가? 셋째, 나는 나의 작은 “자아”를 십자가에 달리신 위대한 “그분”께 내맡기는 것을 실행하고 있는가?
이상의 세 가지 내용으로 우리는 예수님께서 당신 제자들에게 하신 다음 말씀을 깊게 성찰할 수 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태 1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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