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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호 주교(2)[가톨릭신문 2022-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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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22-09-22 조회 2,042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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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 원로 주교의 삶과 신앙] 4. 이병호 주교(2)

“성경 속에 깊이 잠기면 하느님께서 함께 걸어주십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거르지 않는 산보
복음 말씀 외우면서 두 시간 가량 걸어
“대자연 속에서 말씀을 눈으로 보는 셈”

발행일2022-09-25 [제3311호, 15면] 

 

이병호 주교는 매일 아침 거의 두 시간이 걸리는 산보에 나선다. “걸으면 정신뿐 아니라 몸도 최대로 활기찬 상태에 들어가기 때문에 평소 잘 떠오르지 않던 생각들이 마치 폭포처럼 쏟아지기도 한다”고 말한다.


삶은 누구에게나 무거운 한 짐입니다. 남 보기에는 순풍에 돛단배처럼 아무 어려움 없이 미끄러지듯 가는 것 같은 사람의 삶도 가까이 들여다보면, 나름의 어려움이 다 있지요. 제가 주교가 되자마자 맞닥뜨린 문제가 하나 있었는데, 보통 광신적이라고들 말하는 이들과 관련된 것이었습니다. 사제까지 깊이 연루되어 있는 바람에 어려움이 훨씬 더 복잡해졌지요. 그 일은 이후 수십 년 동안 이어졌고, 한때는 전국적으로도 크게 물의를 빚기도 했습니다. 주교님들 중에서도 그 일의 깊은 내막을 아시는 분들이 별로 안 계셨는데, 당시 생존해 계셨던 수원교구의 김남수 주교님께서는 거기에 관해서 아주 조금만 들으시고도 깜짝 놀라시며, “나는 이렇게 오래 주교 생활을 했어도 그런 일이 없었는데, 그런 일이 다 있었나요?”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즈음 치명자산에 올라가서 유항검님을 비롯한 이순이 루갈다와 유중철 요한 동정 부부 등 가족 순교자들이 모셔져 있는 묘 앞에서 기도를 드리곤 했습니다. 특별히 마음이 무겁던 어느 날, 거기에 갔더니 초로의 한 자매님이 무덤을 부둥켜안고 통곡을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보고 있자니 문득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금 내가 저러고 있어야 하는 건데.” 주교라는 체면 때문이었을까? 저는 그저 바라만 보고 있었지만, 그런 처지에 계속 눌러있으면, 그 스트레스로 적어도 암은 걸려야 맞을 것 같은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이렇게 멀쩡한 건강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저에게는 가장 확실한 답이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아침 일찍 일어나 그날 미사에 나오는 성경 대목을 대하고, 토씨 하나까지 그냥 넘기지 않으려고 집중하면서 읽고, 여러 번 읽어서 외우고 난 다음에, 십자가를 바라보거나 눈을 감고 계속 묵상하면, 세상에서 벼락천둥이 치고 별 일이 다 일어나도 저는 성경이 펼쳐 보이는 세계에 몰입해 있어서, 바깥의 일은 떠오르지도 않지요. 그리고 그때 떠오른 생각들을 강론에서 나누면, 생각이 한결 더 선명해지고 저 자신에게도 더 확실한 믿음으로 돌아오는 것을 느낍니다. 그렇게 성경 속으로 깊이 잠기면 “하느님께서 낙원을 열고 함께 걸어주신다”(2008년 세계주교시노드 후속 문헌 「주님의 말씀」 87항 참조)는 암브로시오 성인의 말씀이 무슨 뜻인지를 체험하게 되지요.

매일 새벽미사를 마치고 아침 산보에 나서서 치명자산을 향해 가서 순교자 묘와 경당을 거쳐서 돌아오곤 했습니다. 성서사도직 관계 아시아대회 참석차 방콕에 갔다가 다리를 크게 다친 다음부터는, 여정을 바꾸어 치명자산 아래를 거쳐서 교구가 마련한 토지를 임시 농장으로 쓰고 있는 데까지 갔다 옵니다. 지금은 한 시간 50분에서 거의 두 시간이 걸리는데, 이 산보가 또 큰 의미가 있는 것 같습니다. 옛날부터 성경이 둘이라는 믿음이 있어왔는데, 하나는 종이에 적혀 있고, 또 하나는 대자연이라는 이름으로 우리 주변에 펼쳐있지요. 그러니까 성당 감실과 십자가 앞에서 읽는 하느님 말씀은, 말하자면, 귀로 듣는 것이고, 밖에 나가서 자연 속에 들어가면 그 말씀을 눈으로 보는 셈이지요. 가만히 앉아 있는 것과 온몸을 움직여 걷는 것은 각기 특유의 의미가 있는 것 같습니다.
 

인보성체수도회 전주 본원에서 시작해 치명자산 아래를 거쳐 한참을 걸어온 이 주교가 전주교구가 마련한 토지에 세운 임시농장 앞에 서서 새벽부터 되새겨온 성경 구절을 큰 소리로 외우고 있다.


그런데 이른 아침 성당에 들어갔을 때나 산보 때 이러 저런 경험을 한다고 해서 거기에만 머물러 있으면, 대단히 큰 착각 속에 빠질 위험이 크지요. 타볼산에서 예수님의 모습이 변하고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 그분과 이야기하는 장면을 본 베드로가 그 황홀경에 계속 눌러앉고 싶어서 한 말을 성경은 기록해 두었지요. “주님, 저희가 여기서 지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저희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선생님께 드리고, 하나는 모세에게 하나는 엘리아에게 드리겠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의 그런 환상을 여지없이 깨어, 온갖 골치 아프고 말이 안 되는 일들이 일어나는 현실 세계로 내려가게 하셨지요. 기도와 활동은 날숨과 들숨처럼 번갈아 있어야 둘 다 건강하고 참 의미를 띠지요. 이 중 하나에 고정되면, 영적 생명도 죽을 수밖에 없지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아침 산보를 거르지 않으니까, 어떤 분들은 건강을 위해서 그러느냐고 묻기도 하고, 때로는 그렇게 건강하게 된 비결이 무엇이냐고 물으시는 분들도 계십니다. 그런 때 저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건강요? 그것을 우선적으로 생각하면 건강하기는 이미 틀렸습니다.” 예수님 말씀은 이런 일에도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것을 구하여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마태 6,33) 앞세울 것을 분명히 하면, 다른 것들은 자연히 따라온다는 말씀이지요.

아침 산보에서는 성당에서 시작한 성경 묵상을 자연 속에서 계속하는 것 자체에 의미를 두고 있는데, 그러다 보니 건강은 부산물로 따라오는 것 같습니다. 사실 ‘어느 순간에 죽어도 좋다’는 마음으로 살면 건강은 덤으로 오는 것 아닐까요?

정리 주정아 기자 stella@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