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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 이태원 참사로 목숨을 잃으신 분들을 생각하며-이병호 주교[가톨릭신문 2022-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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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22-11-04 조회 2,248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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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 이태원 참사로 목숨을 잃으신 분들을 생각하며

‘생존공간’ 무너진 현장, 희생자들의 울부짖음 기억해야

발행일2022-11-06 [제3317호, 7면] 

 

10월 31일 서울 용산구 이태원역 1번 출구 앞 추모 공간에서 시민들이 이태원 사고 사망자들을 추모하고 있다.사진 염지유 기자


지난 10월 29일 서울 이태원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인파에 밀려 죽거나 다치는 사고가 발생했다. 전 전주교구장 이병호(빈첸시오) 주교는 이번 사고를 접하고 이 사고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묵상했다. 이 주교의 묵상 내용을 특별기고로 전한다.


2022년 10월 29일 밤 10시15분께 서울 이태원에서 있었던 사고는, 이 글을 쓰는 중인 2022년 10월 31일 오후 2시 현재의 보도에 따르면, 외국인 26명을 포함한 사망자 154명, 부상자 149명, 총 303명의 사상자를 낸 초대형 참사였습니다. 부상자 가운데에는 중상자도 30명이 넘어서, 당국에서는 추가 사망자가 나올 수 있다고 발표했습니다. 이 사건은 그 규모에서뿐 아니라, 그것이 일어난 정황에서도 아마 우리가 기억하는 인류 역사에 선례가 없었다고 할 만큼 너무나 특이해서, 즉시 전 세계로 알려졌고, 여러 나라의 정상들이 즉각적으로 애도와 위로의 뜻을 전해올 만치, 지구촌 전체를 흔들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다음 날 새벽 미사에서, 저는 인보성체수도회 본원에서 수녀님들과 함께 이번의 일로 희생되신 분들과 유가족, 친지들, 그리고 이번 참사로 피해를 보신 모든 분들을 하느님께서 당신의 무한한 능력과 자비로 감싸주시고, 위로해 주시라고 기도드렸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께서 이런 소식을 들으셨다면 어떤 반응을 보이셨을까 하는 생각도 동시에 들었습니다. 그런데 요즈음 우리가 미사에서 묵상하는 루카 복음(13장)에서 이번 참사와 비슷한 일에 대한 소식을 듣고 보이신 그분의 반응이 소개되어 있기 때문에 그 부분을 다시 읽었습니다.



바로 그 때 어떤 사람들이 예수께 와서 빌라도가 희생물을 드리던 갈릴래아 사람들을 학살하여 그 흘린 피가 제물에 물들었다는 이야기를 일러드렸다. 예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그 갈릴래아 사람들이 다른 모든 갈릴래아 사람보다 더 죄가 많아서 그런 변을 당한 줄 아느냐? 아니다. 잘 들어라.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망할 것이다. 또 실로암 탑이 무너질 때 깔려 죽은 열여덟 사람은 예루살렘에 사는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죄가 많은 사람들인 줄 아느냐? 아니다. 잘 들어라.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망할 것이다.”(루카 13,1-5).



의도적으로 저지른 빌라도의 살인 행위, 그리고 어느 정도 자연적 재해라고 할 수 있는 실로암 탑 붕괴에 따른 수많은 사람의 죽음에 관한 소식. 이런 일들이 지금 그때와는 비교할 수 없이 큰 규모로 일어나고 있습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사이의 전쟁, 바로 우리나라에서 남북 사이에 긴장이 점점 더 높아지고 역시 핵무기의 위협이 그만큼 더 현실적으로 느껴지고 있습니다. 미국과 중국 사이에도 그렇지요. 당사국뿐 아니라, 그 여파가 번질 수밖에 없는 주변의 모든 나라들이 손에 땀을 쥐고 지켜보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이런 일이나 사태에 관한 소식을 들으면 남 일로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소식을 대부분 뉴스로 듣고 있는 우리가 아직 살아있는 것은 무엇 때문인지에 관해서도, 예수께서는 비유를 들어 설명해 주십니다.



“어떤 사람이 포도원에 무화과나무 한 그루를 심어놓았다. 그 나무에 열매가 열렸나 하고 가보았지만 열매가 하나도 없었다. 그래서 포도원지기에게 ‘내가 이 무화과나무에서 열매를 따볼까 하고 벌써 삼 년째나 여기 왔으나 열매가 달린 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으니 아예 잘라버려라. 쓸데없이 땅만 썩일 필요가 어디 있겠느냐?’ 하였다. 그러자 포도원지기는 ‘주인님, 이 나무를 금년 한 해만 더 그냥 두십시오. 그 동안에 제가 그 둘레를 파고 거름을 주겠습니다. 그렇게 하면 다음 철에 열매를 맺을지도 모릅니다. 만일 그 때 가서도 열매를 맺지 못하면 베어버리십시오.’ 하고 대답하였다.”



여기에서 포도원지기는 예수님 자신이고 우리는 모두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들입니다. 우리의 소행대로 하자면 일찌감치 잘렸어야 하지만, 그런 우리가 아직 살아서 숨 쉬고 있는 것은, 우리에게 거름을 주어 그 힘으로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해 예수님께서 주인이신 아버지께 간청해서 얻어주신 유예 기간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최근 들어 미국 50개 주 가운데 5개 주에서 사람의 시신을 거름으로 만드는 퇴비장(堆肥葬) 법이라는 것이 통과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니, 예수님께서는 열매 맺지 못하는 우리의 힘을 북돋아주시기 위해, 당신 자신의 몸과 피를 먹고 마시게 하셨다는 사실이 새로운 빛으로 다가옵니다. “51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빵이다… 56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서 살고, 나도 그 안에서 산다.”(요한 6장)



유예 기간은 인간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닌 듯합니다. 인류의 역사뿐 아니라 지구의 역사에서도 처음으로, 우리는 생명과 그 어머니인 지구의 생존을 위해서 주어진 유예 기간이 얼마 남지 않은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2020년 9월 뉴욕에 처음 설치되어, 서울을 포함한 전 세계 여러 지역에도 빠르게 퍼져나가고 있는 ‘기후시계’를 열어보니, 이 글을 쓰기 시작한 2022년 10월 31일 오전 8시30분 현재, 지구와 인류가 살아남기 위해서 탄소배출을 극적으로 줄이기 위해서 허락된 시간이 6년 264일 16시간 29분 50초가 남았음을 보여주는 시계가 급속도로 돌고 있었습니다. 초 단위는 너무 빠르게 바뀌어 세기조차 힘들고, 바라보는 동안 분 단위도 급하게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숨 돌릴 틈도 없이 흐르고 있는 시간 속에서, 가만히 선채로 숨이 막혀 얼굴색이 변해가고 있는 사람만큼이나, 생명의 어머니인 지구도 급박한 목소리로 살려달라고 외치고 있는 형국입니다.



‘시간’이 그렇다면 ‘공간’은 어떨까요? 프랑스에 있었을 때, 더러 들었던 ‘에스빠스 비딸(l’espace vitale)’이라는 말이 새삼 떠오릅니다. 사람이 살기 위해서 꼭 필요한 최소한의 공간을 의미하는 이 ‘생존공간’이라는 말이 이번 사고를 대하며 가슴에 절실하게 울립니다. 한겨레신문에 따르면 “당시 상황을 찍은 영상을 보면, 좌우가 막힌 약 38평 넓이 골목 한가운데 갇힌 수백 명 인파가 엄청난 압력으로 서로를 ‘수평으로 누르면서’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한 이들이 ‘선 채로’ 의식을 잃기 시작했다”는 표현이 나옵니다. 넘어진 것도 아니고 꼿꼿이 서 있었는데도 숨이 막혀 죽어가는 현상이 벌어졌다는 것입니다. 과거에 어디에서도 없었을 듯한 이런 일이 지금 우리 눈앞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이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은 무엇일까요?

코로나19 바이러스는 새로 생겨난 것이 아니고 오래 전부터 있었다고 하지요. 그런데 그것을 몸속에 가지고 살던 동물들이 인간들에게 생존공간을 빼앗기면서, 그곳을 떠나 다른 생존공간을 찾아 밀리고 밀려 인간 세계에까지 들어오는 바람에, 그 안에 있던 바이러스가 우리에게까지 오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번과 같은 일이 다시 반복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해당 지역에서 촬영된 영상물과 많은 분들의 증언을 통해서, 사태의 전 과정을 처음부터 끝까지 투명하게 밝히고, 거기에 합당한 대책을 마련해야 할 것입니다. 지금 우리로서는 이번 사태를 직접 체험하신 분들뿐 아니라, 매체를 통해 지켜본 국민, 나아가 전 세계 인류에게까지, 이번에 희생되신 분들이 ‘인간 기후시계’의 역할을 하여, 모든 사람들이 제 정신을 차리게 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해서, 지구와 살아있는 모든 것들이 다시 제 자리로 돌아가, 각기 생존공간을 지키며 살게 하는 데에 큰 역할을 할 수만 있다면, 이 젊은이들의 짧았던 삶이 풍부한 결실을 맺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핼러윈 데이’는 ‘거룩함’을 뜻하는 이름 그대로, 매년 가톨릭교회에서 11월 1일에 지내는 ‘모든 성인 대축일’, 곧 이름 없고 알려지지 않은 ‘거룩한 이들’을 경축하기 위해서 지내온 축일 전날, 소박한 민중들이 지내온 축제입니다. 따라서 그 축일 본 날, 세계 어디에서나 드리는 미사에서 듣게 되는 성경 말씀은 그 축제의 의미를 잘 표현합니다. 그날 제1독서로 읽는 묵시록 7장의 한 대목은 구원받은 표지로 하느님의 도장을 찍어 받은 이들이, 이스라엘 12지파 가운데에서는 14만4000명, 그리고 국가, 민족, 백성, 언어가 다른 사람들 가운데에서 그 도장을 받고 흰 두루마기를 입게 된 사람들의 숫자는 무한하다고 말합니다. 그들이 어떻게 그처럼 순결하게 되었는지에 관해서는 원로 중 하나가 설명합니다. “저 사람들은 큰 환난을 겪어낸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어린양이 흘리신 피에 자기들의 두루마기를 빨아 희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제2독서에서 듣는 요한 1서(3,1-3)는 하느님의 자녀들이 그리스도를 만나 ‘그분과 같은 사람’이 될 것이라는 희망을 가진 사람들은 누구나 그리스도처럼 자기 자신을 순결하게 한다고 말합니다. 어린양의 피로 모든 죄를 씻음으로써 그렇게 하는 것이지요. 그런 사람들에게는 세상의 평가나 인정 여부는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이번 일로 사랑하는 가족이나 친구를 잃은 분들 어떤 이들은 앞서 가신 분들에 대한 이상한 소문 때문에 더 큰 상처를 받으시는 모양이지요? 그러나 남을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더구나 세상을 떠난 분들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판단할 권리가 없습니다. “남을 판단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판단받지 않을 것이다”(마태 7,1) 우리는 너나 할 것 없이 어린양의 피로 씻어지지 않으면 죄에서 벗어날 길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십자가 아래에는 세 여인이 서 있었습니다.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 예수의 이모이자 클레오파의 아내인 마리아, 그리고 막달라 출신 마리아입니다. 죄와 관련해서 말한다면, 한 분은 백조(白鳥), 또 한 분은 흑조(黑鳥), 가운데에는 그 중간인 회조(灰鳥)라고 할 수 있는 이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결국에는 그 모두가 십자가에서 흘러내리는 예수님의 피로 씻겨 똑같이 백조가 되었습니다. 시간차만 있었을 뿐입니다.

바로 그 피를 흘리시는 분을 두고 일찍이 이사야가 그로부터 600여 년 전에 하느님의 입을 빌어 한 예언이 그대로 실현된 것입니다.


“나는 그로 하여금 민중을 자기 백성으로 삼고 대중을 전리품처럼 차지하게 하리라. 이는 그가 자기 목숨을 내던져 죽었기 때문이다. 반역자의 하나처럼, 그 속에 끼어, 많은 사람의 죄를 짊어지고 그 반역자들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했기 때문이다.”(이사 53,12)
 

이병호 빈첸시오 주교(전 전주교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