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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으로 콩 한쪽도 나눈 교우촌 정신 되새겨야[가톨릭평화신문 2018-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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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18-11-16 조회 2,270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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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으로 콩 한쪽도 나눈 교우촌 정신… 되새겨야
호남 교우촌 공소 순례
2018. 11. 11발행 [148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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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의 마지막 날, 단풍으로 붉게 물든 시골 길을 달려 전라북도 정읍시 신성공소에 도착했다. 찾아올 손님이 없다는 듯 가을볕 아래 말려둔 볍씨가 대문 앞에 펼쳐져 있다. 무거운 나무 대문을 밀어젖히자 마당을 지키는 성모상 너머 낡은 종탑과 한 채짜리 기와집 공소가 손님을 맞이한다. 공소는 1893년부터 이 자리를 지켰다. 한적한 지금 모습으론 상상하기 어렵지만 박해 시절 관군의 기습에 대비해 견고한 담장을 쌓아올렸던 ‘치열한’ 과거를 간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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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앙 선조들은 박해를 피해 궁벽한 산지로 숨어 신앙 생활을 이어갔고 천호성지에서 여산성지로 이어지는 길에는 피의 역사가 잠들어 있다.



평신도희년 폐막을 앞두고 ‘평신도가 세운 한국 교회’의 뿌리를 찾아 호남 교우촌과 공소를 순례했다. 한국 천주교회는 공소에서 시작했다. 신앙 공동체만 있고 성직자가 없던 시절 공소에서 신앙이 꽃폈다. 1890년대 전라북도 천호산 기슭에만 7개 공소가 있었고 인근 고산 지방까지 57개 공소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산수골, 어름골, 미사골, 성체골…’ 완주군 비봉면 내원리 천호산은 깊은 골짜기에서 골짜기로 이어진다. 신앙 선조들은 박해를 피해 궁벽한 산지로 숨어들었다. 천호성지에서 여산성지로 이어지는 길에는 피의 역사가 잠들어 있다. 천호성지에는 병인박해(1866년) 순교 성인 4위(손선지, 정문호, 한재권, 이명서)와 무명 순교자들이 모셔져 있고, 되재공소 뒷산에는 공소 순회를 위해 험한 산길을 헤매다 병을 얻어 20~30대 이른 나이에 선종한 파리외방전교회 사제들이 묻혀 있다. 익산시 여산성지에서는 수장형, 참수형, 백지사형(손과 발을 발을 결박한 죄수에게 물묻은 창호지를 얼굴에 덮어 숨을 못쉬게 해 처형) 등 잔인한 방법으로 천주교인들을 처형했던 순교지를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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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강 이남 최초 성단건축물 되재공소에 129번째 가을이 왔다. 공소회장 송인환씨와 전주교구 사회사목국장 김봉술 신부가 가을을 만끽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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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호(다리실)공소는 1839년 기해박해 이후 형성된 천호공동체의 시작점으로 호남의 첫 본당사목지다. 2011년 고산본당 소속에서 준본당으로 승격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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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장산 인근 교우촌 신자들의 신앙 못자리였던 정읍 신성공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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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창 한센인촌에서 일평생 봉헌한 강칼라 수녀.




처형당한 천주교인은 묻혀서도 하늘을 볼 수 없도록 뒤집어 묻게 했다. 박해는 가혹했다. 하지만 ‘박해의 폭풍이 오히려 복음의 씨를 더 멀리 날렸다.’(파리외방전교회 샤를 달레 신부 기록 中) 1791년 신해박해 이후 형성된 교우촌은 박해가 거듭될수록 오히려 확산됐다.

31년째 완주군 천호마을을 지키고 있는 김진소 신부(호남교회사연구소 명예소장)는 “교우촌은 사랑과 섬김, 나눔을 통해 예수의 삶을 그대로 실천에 옮겼던 공간”이라고 소개한다.

“프랑스에서 온 보드네 신부가 1899년 장수군 양학공소를 방문한 뒤 고국에 편지를 씁니다. ‘주교님 저는 놀라운 것을 체험하고 있습니다. 여기 신자들은 양반도 없고 상놈도 없고 모두가 한 형제자매로 콩 한 쪽도 나눠 가지고 있습니다. 사도 시대 공동생활이 지금 조선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처럼 신자들은 삽을 한번 찌르면 바로 돌이 나올 정도로 험한 땅에서 손톱이 뽑혀가며 화전을 일구면서도 기도하고 사랑하며 서로 돕고 살았습니다.”

박해 이후 100여 년의 시간 속에서 공소는 함께 모여 기도하는 공간 그 이상이 됐다. 공소는 교우촌 공동체의 중심으로 교육, 복지, 자선의 역할까지 담당하며 세상 가장 낮은 이들 곁에 기꺼이 머물렀다. 1952년 고창군 호암마을에 세워진 동해원공소는 한센인들과 신앙공동체를 이루고 치료와 교육에 앞장섰다. 호암마을에서 일평생을 봉헌한 이탈리아 출신 강칼라(달로네 리디아, 작은 자매 관상선교회) 수녀는 작은 후회와 큰 기쁨으로 지난 50년을 기억한다. 강 수녀는 “아무리 배워도 어려웠던 한국어, 전기가 없어 호롱불을 밝혔던 시절은 힘들었지만, 이 보배로운 곳에서 가족 같은 이들을 만났다”며 “큰 상처를 가진 이들 옆에 있어 주는 것, 서로 받아들이고 노력하면서 함께 걸어가는 것 그 자체가 하느님을 따르는 길이 아니었나 생각한다”고 추억했다.

완주군 고산 교우촌에서 5대째 살고 있다는 송인환(루카, 되재공소 회장)씨는 마을의 기도처이자 사랑방, 놀이터, 공부방으로 분주했던 공소를 기억한다.

“마을에 학교가 생기기 전에도 천주교 신자라면 한글을 다 알았어요. 청년들이 마을 사람들을 모아놓고 야학을 열었으니까. 신앙 교육도 엄격했습니다. 어릴 때 「천주교 요리문답」 320개 조목을 못 외워 쫓겨난 기억이 지금도 선합니다.”

도시가 커지고 골짜기마다 길이 닦이면서 공소의 삼종 소리는 멈췄다. 종을 칠 사람도 없다. 72세 송인환씨는 공소 레지오 마리애 단원 막내다. 주일이면 본당으로 나가기 때문에 공소 문은 매달 마지막 주 토요일 미사 때를 빼고는 닫혀 있다. 전주교구 내 공소는 74개만 남았다.

성체골 교우촌 출신 김선태 주교(전주교구장)는 “안타깝지만, 시골의 공소 공동체가 줄어드는 것은 교회가 막을 수 없는 큰 흐름”이라며 “다만 사랑, 섬김, 베풂 등 교우촌의 아름다운 정신을 우리 안에 되살려 도시 본당 안에서 이어나갈 방법을 고민해야 할 시점”이라고 말한다.

“최근 30년 동안 교회가 양적 성장에 급급했습니다. 위기, 정체 국면에 접어든 지금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우리 교회의 시작은 공소입니다. 최근 공소 신앙과 교우촌 믿음 사례를 발굴하고 피정과 순례 공간으로 탈바꿈하려는 움직임이 시작되고 있습니다. 잃어버린 우리의 정신을 되새기는 것이 첫걸음이 되어야 합니다.”

유은재 기자 you@cpbc.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