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최초의 순교자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권상연 야고보, 신유박해 순교자 복자 윤지헌 프란치스코 유해 및 유물 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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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21-09-08 조회 955회본문
역사적 의의
2021년 3월 11일 전주교구 초남이 성지에 소재한 바우배기 묘소에서 한국 최초의 순교자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복자 권상연 야고보, 그리고 신유박해 순교자 복자 윤지헌 프란치스코로 추정되는 유해가 발견되었다. 이 발견은 시성을 앞둔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복자들과 시복을 추진 중인 수많은 하느님의 종들을 통하여 하느님께서 섭리하시는 신앙의 소명을 일깨우는 사건이다.
교회 안에서 순교자들의 유해는 늘 각별한 공경과 관심을 받아 왔다. 부활하게 될 성인과 복자의 몸은 지상에서 성령의 살아 있는 성전이었으며 시복 시성을 통하여 사도좌가 인준한 그들 성화의 도구였기 때문이다. 성인과 복자의 유해는, 그 진정성을 보장하는 교회 권위에 의해 신자들의 공경을 받는다.
2021년 5월 전주교구장 김선태 사도 요한 주교는 <순교자현양단>을 구성하여 한국 최초의 순교자 유해발굴과 전문적 조사과정에서 검증된 사실을 교회법적 공증을 통해 유해의 진정성을 확인하고 그 의의와 가치를 교회와 세상에 공유하는 작업을 지시하였다. 순교자현양단은 그동안 진행된 발굴 내용과 공증절차를 면밀히 검토하고 정리하여 보고서를 발간하기로 계획하고 이를 진행하였다.
발견 과정
김성봉 프레드릭 신부(초남이성지)는 2000년 김환철 스테파노 초대 신부로부터 이어 온 초남이성지 개발을 더 본격적으로 추진하기 위해 바우배기 묘지를 국가로부터 매입하기로 하고 이장업체를 통해 무연고 묘지 8기를 개장하다가 선명한 한자로 신원이 적힌 백자사발지석을 발견하게 되었다.
김 신부는 교구에 보고, 김선태 주교의 명에 따라 이 사실을 호남교회사연구소에 알렸다.
유해 발견 이틀이 지난 3월 13일(토) 14시 호남교회사연구소(소장=이영춘 신부)는 초남이성지 교리당에서 김선태 사도 요한 주교를 비롯한 김희태 사도 요한 신부(교구 총대리), 김성봉 프레드릭 신부(초남이성지), 김진소 안드레아 신부(호남교회사연구소 명예소장), 김진화 마태오 신부(전주교구법원 사법대리), 윤덕향 안토니오 교수(前 전북대학교 고고문화인류학과), 송창호 벨라도 교수(전북대학교 의과대학 해부학 교실)를 모시고 유해 발견 현황과 고고학적 추가 발굴의 필요성, 해부학적 검증 방안과 유물의 보존 처리 등 긴급한 당면 과제를 논의하였다.
총 8기의 묘소 가운데 고고학적 발굴에서 얻은 나무 조각 등으로 탄소연대측정을 통해 묘소의 조성 시기를 추정하여 무덤 3호, 5호, 8호만이 순교 복자와 유관하다고 선별하여 우선 조사에 집중하도록 하였다. 절묘하게도 김환철 신부가 초남이성지 마을 분들에게서 “천주교인 묘지가 있었다.”라는 얘기를 자주 듣고 얕은 봉분 자리의 봉분을 돋아 십자가를 세웠던 바로 그 자리들이었다. 당시 이미 일대를 조사해 보았으나 이제 와 돌아보건대 유물이나 유해가 아주 깊게 위치한 터라 안타깝게 발견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봉분을 걷어 낸 상태에서 백자사발지석이 나왔고 그로부터 일반묘소보다 더 깊은 곳에 유해가 묻혀있었다. 남문밖에 효수되었던 신앙의 동지를 9일 만에 관장의 허락을 받은 유항검의 고향인 바우배기에 모신 것은 복자 유항검 아우구스티노가 중심이 된 초남이 신앙공동체가 아마도 먼 훗날 후손들이 찾아주기를 기대하며 훼손을 두려워하듯 아주 깊이 모셨던 것이다.
백자사발지석의 글씨를 통해 무덤 3호 유해는 권상연 야고보, 무덤 5호 유해는 윤지충 바오로로 추정되었지만, 무덤 8호 유해는 백자사발지석 대신 검은 가루가 담긴 두 개의 백자제기접시가 포개어 있을 뿐 글씨가 없어 바로 신원을 확인할 수는 없었다.
먼저, 후일 복자들의 두상이나 전신상 제작을 염두에 두고 컴퓨터 단층 촬영CT을 통해 유해의 3차원 영상을 확보한 다음 해부학적 조사를 전북대 해부학실에서 수행하였다. 골반의 형태는 남자였고 치아의 부식 정도와 대퇴골의 골밀도를 측정하여 사망 시 연령을 추정하였는데 무덤 3호 유해는 41세, 무덤 5호 유해는 33세로 백자사발지석이 말해주는 신원의 공식 기록에 부합하였다. 뼈의 유무와 형태 관찰에서는 무덤 5호, 그러니까 윤지충 바오로 추정 유해의 5번 경추에 날카로운 도구에 잘린 흔적이 확인되었는데 이는 묘소 개장 당시 유해의 머리가 정면을 바라보지 않고 한쪽으로 돌려져 있어 참수형을 당한 유해가 아닐까 하는 짐작을 확증시켜 주었다.
다음으로 가장 과학적인 분석으로 유전자 염기서열을 비교하는 Y-STR검사를 실시하였는데 남성의 Y염색체에서 추출한 유전자의 ‘짧은 염기서열 반복 구간’이 집안마다 다르다는 점을 이용해 친자나 가족관계 등을 밝힐 수 있는 최신 방법을 이용하였다.
처음에 치아를 다우진유전자검사소에 보내 유전자 검출을 두 차례 시도했으나 유전자 추출에 실패했고 다시 대퇴골을 절개한 시료를 통한 2개월간의 세 번째 시도에서 유전자 추출에 성공하였다. 그 분석 결과, 무덤 3호 유해는 안동 권씨 유전정보와 거의 일치하였고 무덤 5호 유해는 100% 해남 윤씨 유전정보의 것과 같았다. 이때 무덤 8호 유해 샘플도 함께 보내졌었는데 애초 형태 관찰 시 두개골 형상이나 신장이 무덤 5호 유해와 유사하고 팔다리 유해가 없었던 점으로 미루어 1801년 신유년에 능지처참형으로 순교한 복자 윤지헌 프란치스코가 아닐까 추정하였던 것이, 유전자 검사에서 해남 윤씨로 밝혀지면서 복자 윤지헌의 유해로 확신할 수 있게 되었다. 이는 유해의 사망 시 연령이 37세로 10년 전 순교한 윤지충의 5살 어린 동생 윤지헌을 추정한 것과도 일치하는 결과였다.
8월에 이르러 교구는 특별법정(담당=김진화 신부)을 개정하고 이 모든 일이 교회법의 절차에 따라 하자가 없고 신뢰할 수 있으며 복자의 유해라는 진정성이 사실임을 공증 받아 교구장 김선태 주교에 의해 9월 1일(수) 오전 11시, 교령을 발표하였다.
이로써 윤지충 바오로와 권상연 야고보 그리고 윤지헌 프란치스코 복자의 유해를 의심 없이 하느님의 선물로 받아들이고 증거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교구는 9월 16일(목)에 초남이성지에서 ‘현양 미사 및 유해 안치식’을 통해서 신자들이 언제든 찾아가 뵙고 기도하며 그 신앙 모범을 따르도록 인도할 것이며, 9월 24일(금)에는 ‘복자 3분의 유해 진정성에 관한 보고회와 묘지 현장 방문’을 통해서 복자 3분의 유해가 틀림없음을 다시 한 번 확인할 것이다. 이를 위해 유해 공경을 위한 기도문과 자료집, 안치소 정비에 따른 경배절차와 유해 순례기도 준비를 당장 서두를 것이다. 김환철 신부가 봉분을 돋우고 십자가를 세우며 20년간 애써 온 성지개발 사업이 이번 바우배기 묘의 실질적 권리를 주장할 근거가 되었듯이 앞으로도 교구는 신유박해 때, 또는 그 이후에 순교하신 분들이 아직도 묻혀 있을 가능성이 높은 곳으로서 초남이성지와 바우배기, 그리고 그 일대에 대해 한층 치열한 연구를 통해 유해발굴과 개발에 힘을 쏟고 성역화 사업계획 및 추진, 기도운동, 순교자 연구 활동, 복자 3분의 초상화 제작 등의 현양운동도 착실히 전개해나갈 것이다. 또한 전주교구의 이번 순교자 유해 발견, 발굴의 일련의 과정이 앞으로 한국천주교회의 순교자 유해발굴에 모범이 될 수 있도록 가능한 과학적인 증거를 마련하고 교회법적인 것은 물론 사회법적인 준수 사항을 대비해 가는 체계를 제시할 것이다.
맺음말
우리는 이번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권상연 야고보, 그리고 복자 윤지헌 프란치스코의 유해를 모시게 됨으로써 한국교회의 순교신심이 복자 윤지충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과 윤지충의 순교 이후 한국천주교회가 대중적인 교회로 바뀌었다는 교회사적 의미를 다시 묵상하며 자신의 목숨을 내어놓으면서까지 하느님 사랑을 드러낸 순교자의 모범을 따른다면 우리도 풍성한 구원의 열매를 맺는 데 도움을 받을 수 있음을 확신해야 한다.
김선태 주교는 “하느님께서 세 분의 복자를 우리 교회에 드러내 보이셨다는 것은 우리에게 엄청난 사명을 주시는 것이다.”라며 “현대 신앙을 일깨우는 메시지를 갖고 있는 것 같다. 교회 역사학자나 신학자들이 두고두고 묵상하며 그 의미를 발견하고 계속 신자들에게 전하면서 한국 교회가 새로 일어서는 계기로 삼아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교회는 신앙 선조들이 흘린 순교의 피를 밑거름으로 탄생했고 오늘의 성장을 가져왔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이 겪고 있는 심각한 영적 정체성의 혼돈 속에서 교회가 증거 해야 할 신앙의 참모습은 점점 더 퇴색하고 있다. 교회의 외적인 성장에 비해 신앙 선조들이 지켰던 영적인 생명에 대한 갈망과 영적 감각이 무디어지고 신앙을 증거하는 열정도 식어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 성과와 가치는 교회사나 신앙적 차원만의 일을 넘어 한국 사회의 문화적 차원으로도 중요한 성과와 가치라 할 수 있다. 한국천주교회의 역사도 이제 200년을 넘어 300년을 향해 나아가고 있으며, 이미 한국역사와 사회·문화에 깊이 들어와 있다. 이번 한국의 첫 순교복자들의 묘지와 유해·유물의 발견으로 한국천주교회가 한국의 역사·사회·문화에 중요한 자리매김을 하는 기회가 되기를 희망한다.
글 | 홍보국 정리, 사진 | 호남교회사연구소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