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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백합 59호(겨울)-신앙의 오솔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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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7-12-18 11:12 조회1,86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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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아주 늦게 저는 무릎 꿇는 것을 배웠습니다.”

 

1. 인간의 원초적 몸짓
‘무릎을 꿇는다’는 아주 미미한 단어이지만 중대한 의미를 담고 있다. 이 단어가 미미한 이유는 일상에서 거의 언급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에게 중대한 의미를 지닌 이유는, 자기 자신을 깊이 내려놓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아무에게나 그리고 쉽게 무릎을 꿇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자신보다 더 높은 권세 앞에서 무릎을 꿇는다.
그런데 무릎을 꿇는 행위는 어떤 표현인가? 첫째, 감사하는 마음으로 드리는 지극한 존경을 표현하는 행위이다. 루돌프 알렉산더 슈뢰더Rudolf Alexander Schröder(1878-1962)는 『격언과 성찰』에서 이렇게 말한다. “식탁 위에 빵을 보는 사람은, 자기 앞에 놓여 있는 한 잔 포도주를 보는 사람은, 과연 무엇을 보는가? 단지 빵과 포도주만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베풀어주신 하느님을 알아차린다. 요람에서 갓난아이를 보는 사람은, 과연 무엇을 보는가? 갓난아이만이 아니라 그를 지어내시고 지켜주시는 하느님을 본다. 그대에게 무릎을 꿇도록 강요할 수 있는 것은 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다. 그분이 그대에게 나타나시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불타오르는 가시덤불이 꼭 필요한 것은 아니다. 그분은 일상생활에서 늘 나타나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일상 삶에서도 얼마든지 하느님의 현존을 체험하며 감사와 존경의 마음으로 무릎을 꿇을 수 있다.
둘째, 무릎을 꿇는 행위는 곤란한 처지에서 간청하는 표현이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아내가 첫 아이를 낳을 때 분만실 밖 복도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였다고 한다.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니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셨다.
예수님께서는 돌을 던지면 닿을 만한 곳에 혼자 가시어 무릎을 꿇고 기도하셨다. “아버지, 아버지께서 원하시면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십시오.”(루카 22,41-42)
이 장면을 두고 샤를르 드 푸꼬Charles de Foucauld(1858-1916)는 이렇게 해석하였다. “우리가 기도할 때 무릎을 꿇는 이유는 우리 주님께서 우리에게 모범을 보여주셨기 때문이다. 이 이유는 가장 중요한 이유이다. 사랑하면 모방하기 마련이다. 사랑한다면 사랑하는 사람을 늘 바라보며, 그가 행하는 것처럼 행하기 마련이다. 우리 주님이신 예수님을 닮기 위해서 우리는 무릎을 꿇는 것이다. 이런 중요한 요인에 따라 우리는 다음과 같이 계속 추론할 수 있다. 곧 무릎을 꿇는 태도가 가장 겸손한 태도이기 때문에, 또한 사랑의 태도이기 때문에 우리는 무릎을 꿇는 것이다.”
셋째, 무릎을 꿇는 것은 용서를 청하는 표현이다. 도스토예프스키는 1862년 여름 처음으로 외국 여행길에 올랐는데, 쾰른에 도착했다. 당시 그는 쾰른 대성당에 대해 실언을 많이 했다. 왜냐하면 그가 건축학에 종사했던 청년기에 대성당을 온갖 존경으로 대했었는데, 대성당을 직접 처음으로 보고서는 실망하였기 때문이다. 대성당이 그의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한 달 후에 그는 파리에서 다시 쾰른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는 대성당을 두 번째로 보았다. “그때 나는 무릎을 꿇고 용서를 구해야 했다. 나는 처음에 대성당의 아름다움을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2. 렘브란트의 그림
용서를 청하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더 명확하게 파악하기 위해 렘브란트Rembrandt Harmenszoon van Rijn(1606-1669)의 ‘잃었던 아들의 귀환’의 그림을 묵상해보자. 렘브란트는 자신의 죽음이 가까이 이르렀을 때 이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이 그림에서 우리는 누더기를 걸치고 민머리를 하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은 아들을 본다. 무릎을 꿇는 태도는 이루 형용할 수 없는 뉘우침을 표현하고 있다. 아들의 등에 얹은 아버지의 손은 용서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의 옷은 갈기갈기 찢어졌다. 빡빡 깎은 그의 머리와 맨 발바닥은 서로 연관되어 있다. 까까머리는 돼지를 치는 일꾼을 상기시키고, 맨 발바닥은 잃었던 아들이 그의 재산만이 아니라, 영혼까지 상실한 타락의 여정을 상기시킨다. 왼쪽 발의 신발은 벗겨져 있다. 이것은 상처들을 가리킨다. 오른쪽 발은 찢어진 신발로 부분적으로 덮여 있다. 이렇게 발에는 고통 전체와 아들의 상실감이 비추어진다. 제1차 세계전쟁 후에 운송업체 종사자들이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은거지에 있던 상자에서 이 그림을 꺼낼 때, 그들은 갑자기 그림 앞에 고요하게 머물더니 모자를 벗고, 십자성호를 그으며 무릎을 꿇었다고 한다.
무릎을 꿇는 사람에게만 눈이 열리고 볼 수 있는 것이 있다. 이러한 사실을 우리는 라인홀드 슈나이더Reinhold Schneider(1903-1958)가 『여명』에서 소개하는 프랑스의 어떤 젊은 신앙인을 통해서 알 수 있다. 그 젊은이는 자기 수학여행의 마지막 장소로 로마를 선택했다. 여기에서 그는 로마의 예술작품과 건축물을 잘 알고 있던 어떤 사제를 소개받았다. 그는 사제의 안내와 설명을 크나큰 관심과 더불어 잘 받아들였다. 그리고 날마다 감사하는 마음은 커졌다. 바티칸에 인접해 있는 작은 바로코 교회를 방문했을 때 그는 무릎을 꿇고 한동안 고요 속에 머물렀다. 젊은이는 사제의 안내와 설명에는 항상 적절한 경외심이 부족하다는 인상을 받았기 때문에 교회 밖으로 나올 때 이렇게 말했다. “교회 안에서 무릎을 꿇을 때에 비로소 교회를 이해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무릎을 꿇는 것을 배우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할 수 있다. 이것은 빈에서 태어난 시인 에리카 미테레Erika Mitterer(1906-2001)의 체험이다. 그에게도 어느 날 눈이 열렸던 것이다. 어떻게 그리 되었는지 그는 「늦게」라는 자신의 시에서 이렇게 밝힌다. 

나는 얼마나 오랫동안
천장이 아름답게 꾸며진,
그리고 그 제단이 휘황찬란하게 빛나는,
또한 창문이 아름다운 스테인드글라스로 꾸며진
성당만을 찾아다녔던가!

창문의 스테인드글라스는
나에게 아담과 이브에 대한 옛날이야기와,
제자들이 고기를 잡았던 동화를 들려주곤 하였다.
그러나 나의 마음은
지난 긴 나날들 애수로 가득 차 있었다.

나는 영원히 꺼지지 않는
감실의 불빛 속에서
나의 삶을 밝히는 영원한 빛을 보지 못했다.
그러나 나는 늦게,
아주 늦게 무릎 꿇는 것을 배웠다.

 

시인은 아주 오랫동안 성당을 다녔으면서도 진짜 가장 중요한 것에 마음을 두지 않았다고 고백하고, 아주 늦게 가장 중요한 것을 깨달았다고 고백한다. 그것도 무릎을 꿇는 것을 통해서만 감실의 영원한 빛이 지닌 메시지를 이해할 수 있었다는 고백이다. 시인이 영원히 꺼지지 않는 감실의 불빛을 통해서 깨달았던 메시지는, 진퇴양난에 빠진 자신이 이제 걸어가야 할 길, 곧 사랑의 길, 무릎을 꿇는 삶이다.

 

3. 프랑크푸르트 대성당에서 에디트 슈타인의 체험
영원한 빛을 비추어주는 감실과 그 앞에 무릎을 꿇는 인간 사이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성녀 에디트 슈타인Edith Stein(1891-1943)은 25세의 나이에 체험했다. 당시 성녀는 하느님을 믿지 않았던 철학자였는데, 상당히 절망적인 내적 상태에서 친구와 함께 프랑크푸르트 대성당에 방문했을 때의 일이다. 성녀는 자서전에서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몇 분 동안 대성당에 있었습니다. 우리가 경외심에 가득 차 침묵하며 거기에 머물러 있는 동안 시장바구니를 든 어떤 여인이 들어와 장궤틀에 무릎을 꿇고 짧은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 모습은 저에게 완전히 새로운 경험이었습니다. 제가 방문했던 유다인 회당과 개신교 교회에 사람들은 보통으로 예배를 드리기 위해 들어갑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어떤 사람이 평일 한낮에 텅 빈 성당에 들어와 하느님과 다정한 대화를 나누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이 모습을 결코 잊을 수 없습니다.”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여인을 생각하면서 성녀 슈타인은 나중에 이런 말을 남겼다. “감실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저는 마치 어머니의 가슴에 안겨있는 어린이처럼, 하느님의 강한 팔에 감싸여져 평온함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성체 안에 계신 살아계신 주님께서는 당신이 이렇게 빵의 모습으로 현존하고 있다는 것만을 우리가 생각하기를 바라지 않으실 것이다. 그분께서는 빵의 모습으로 현존하시는 당신을 우리가 받아 모시기를 간절히 원하신다.
“주 예수님께서는 잡히시던 날 밤에 빵을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너희를 위한 내 몸이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1고린 11,23-24 참조)
성체를 부당하게 모시면 안 된다는 가르침을 극단적으로 받아들여 성체를 모시기를 아주 꺼려하던 과거 한때의 경향을 오늘날 거의 극복한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요즘 모든 신자들은 미사를 참여할 때마다 대부분 거룩한 성체를 받아 모신다. 그러나 성체를 모시는 것이 아주 당연하게 여길 정도로 너무 익숙한 습관이 되어버렸기 때문에, 우리 자신에게 한번 이렇게 물어볼 필요가 있다. ‘우리가 성체성사로 받아 모시는 분은 도대체 어떤 분인가?’ 그분은 사람이 되신 하느님이시며, 우리 일상에 개입하시는 분이다. 우리는 이러한 일상을 충분히 잘 알고 있다. 우리의 일상생활이란 크고 작은 기쁨이 있는 현장이다. 그러나 일상생활은 기쁨뿐만 아니라 수고와 고통, 배반과 절망, 질병과 고독, 그리고 죽음 등이 계속되는 삶의 현장이다. 따라서 우리가 주님의 몸을 받아 모심으로써, 그분께서 몸소 두루 체험하시고 견디어내셨던 일상, 십자가에서 끝나고 부활에서 완성된 그분의 일상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런 사실을 조금이라도 의식하는 사람은, 왜 주님께서 우리에게 당신의 몸을 빵으로 떼어 주시며 받아먹으라고 말씀하셨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을 것이다. 빵보다 더 일상적인 것은 무엇인가? 빵 안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힘을 받아들이고, 이로써 우리는 우리의 일상을 하느님으로부터 견뎌낸다. 여기에서 분명하게 나타나는 것은, 이 성사의 선물이 열심히 노력하며 살았던 삶의 대가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성체성사의 선물은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서 찾을 수도 발견할 수도 없는 힘이며 양식이다. 따라서 우리는 성체를 모시기 위해 제단 앞에 나올 때마다 주님께 이렇게 고백할 수 있어야 하겠다. ‘나는 내 자신의 힘만으로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살 수 없기 때문에, 지금 주님께 나아가는 것이다.’
이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주님께서는 세족례를 통해서 보여주신다(요한 13,1-11 참조).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시는 이 행동에서 예수님에 대해 떠오르는 것은, 스승이신 그분이 제자들 앞에 무릎을 꿇으셨다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에게 봉사하기 위하여 손수 무릎을 꿇으신다. 창조주께서 피조물 앞에 무릎을 꿇으신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주님이며 스승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었으면,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어야 한다.” 모든 사람은 곧 너희 형제자매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프랑스의 문호 프랑수아 모리아크François Mauriac(1885~1970)는 『평화의 신비』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한 노동사제가 모든 것이 정돈되지 않고 지저분한 장소, 곧 자동차를 수리하는 장소에서 봉헌하는 미사는 하느님 앞에서 모든 것이 잘 정돈되고 아름답게 꾸며진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미사를 장엄하게 봉헌하는 것과 똑같은 것이다.” 왜 그런가? 우리에게는 그 어떤 환경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변화된 빵 속에 현존해 계시는 주님이 무엇보다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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