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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백합 제73호(여름) 신앙의 오솔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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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백인 세실리아 작성일21-06-03 14:55 조회83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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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모든 사람은 부자이며 동시에 가난한 라자로다.

 

죽음 후에 무엇이 오는가?

우리 인간이 역사의 시초부터 지금까지 항상 반복하여 새롭게 다룬 주제가 있다. 그것은 죽음이다. 죽음 이후에는 도대체 무엇이 오는가? 생명이 계속되는가 아니면 모든 것이 완전히 끝나는가?

공자는 이러한 죽음의 문제를 깊이 다루지 않았다. 그의 제자들이 죽음에 대해 거듭 물었을 때 공자는 이렇게 반문했다고 한다. “우리는 삶을 아직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데, 어떻게 죽음을 이해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지금 살고 있는 이승의 삶에 대해 잘 모르는데, 어떻게 저승의 삶에 대해 논할 수 있느냐는 뜻이다. 하지만 공자에게 아주 조심스럽게 묻고 싶다.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이승의 삶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이유는 죽음 이후의 삶, 곧 영원한 생명에 대한 믿음이 약하거나 아예 없기 때문이 아닌가?

그런데 내세, 하느님의 나라, 영원한 생명 등의 주제는 종종 힘센 지배자들에 의해 악용되었다. 말하자면 그들은 백성들이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그 곤경에 대한 보상으로 내세를 제시함으로써 잘못되어 가는 사회의 변혁을 외면하게 했던 것이다. 그래서 내세와 영원한 생명은 이 세상에서 곤경에 처한 사람들의 기분을 전환시키는 도구로 남용되기도 했다. 곤경에 처한 사람들은 장차 누릴 내세를 생각하며 위안을 얻었던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종교를 민중의 아편으로 비난하는 사람들은 현세의 삶을 유독 강조하며 이렇게 주장한다. “우리는 여러분이 살고 있는 이 지상에 낙원, 곧 하늘나라를 세우겠습니다. 우리는 내세라는 말로 여러분을 결코 달래거나 위로하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을 위해서 무언가를 행동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지상에 하늘나라를 약속했던 많은 사람들이 실제로는 지상을 지옥으로 만들었다. 약속된 낙원은 항상 반복하여 끔찍한 독재정치로 나타났다. 이러한 일이 오늘날까지 계속 되고 있다는 것은 깊이 생각해 볼 대목이다.

 

인생을 그르칠 수 있다.

죽음 이후의 내세에는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하늘나라만 있는 것이 아니라 지옥도 있다. 하늘나라는 비교적 인기가 높은 토론 주제이지만, 지옥은 상당히 부담스럽고 껄끄러운 주제이다. 그래서 그런지 대체로 지옥은 사람들에게 재갈을 물리기 위해 고안해 낸 것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종교가 자신의 신념이나 일정한 규율과 도덕을 강요하기 위해 만들어 낸 가상 세계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에 대해 우리는 무엇을 말할 수 있는가? 우선, 우리는 이러한 입장과는 완전히 다른 칼 라너Karl Rahner(1904-1984)의 말을 인용할 수 있다.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는다고 생각하면, 이것은 피조물의 헛된 추정으로써 그리스도교 신앙에 어긋나며 잘못된 것이다. 주님이 최후심판에 관한 담론에서 우리 현존재의 가능한 출구로써 항상 이중적 운명[천국과 지옥]을 제시하셨다면, 우리가 이 이중적인 가능성을 받아들이는 것이 마땅하다. 우리는 우리의 구원을 두려움과 전율로 이루어야 하고, 하느님의 신비는 그분께 내맡겨야 한다.” 이런 가능성을 부인하는 사람은 환영幻影에서 우리를 해방하는 것이 아니라, 정반대로 우리 삶 자체를 환영에 빠지게 한다.

하지만 우리는 이에 대한 여러 질문들을 피할 수 없다. 삶의 이중적 출구 곧 천국과 지옥에 대한 표상은 과연 사랑의 하느님과 일치하는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는다는 생각이 사랑을 강조하는 그리스도교에 더 잘 어울리지 않는가? 신앙은 왜 그러한 어두운 변두리 곧 지옥을 주장하는가? 정의의 관점에서 하느님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라도, 그리고 자유에 대한 인간의 책임을 강조하기 위해서라도 그런 어두운 변두리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 어두운 변두리는 우리의 삶이 정처 없는 여행이 아님을, 곧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 것이 결코 아님을 깨닫게 해준다. 예수님은 늘 반복하여 우리에게 무엇인가가 일어날 수 있다.”고 말씀하신다. 왜냐하면 우리는 인생을 완전히 그르칠 수 있기 때문이다.

 

익명의 남자

이제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루카 16,19-31 참조)를 묵상해 보자. 이 유명한 비유는, 자신의 다섯 형제만은 그 고통스러운 지옥에 오지 않도록 미리 경고해 달라는 부자의 간청에서 절정에 이른다. 그리고 그 다섯 형제가 우리 자신이 될 수 있다는 것이 문제의 핵심이다.

먼저, “부자는 도대체 누구인가?”하고 묻자. 이에 대해 대답하기 이전에 우리가 먼저 강조해야 할 점이 있다. 그것은 그가 부자였거나 호의호식했다는 이유만으로 그를 불경하다거나 나쁜 사람으로 간주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이 지적하셨듯이 부유가 우리의 마음을 어둡게 하여 하느님과 이웃에게 마음의 문을 닫을 여지가 크다는 것이다.

때문에 성경이 그를 소개하는 다음 내용은 곰곰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어떤 부자가 있었는데, 그는 자주색 옷과 고운 아마포 옷을 입고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살았다.”(루카 16,19) 말하자면 그에 대한 주변사람들의 기억에는 이것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그의 이웃은 그가 날마다 좋은 옷을 입고 호화롭게 살았던 것만 기억한다. 반면 그의 이름은 기억하지 못한다. 우리는 왜 그가 라자로와는 정반대로 이름이 없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다. 부자에게는 본래 이름이 있었지만, 사람들은 그의 이름을 기억하지 않았다. 그의 이름은 잊힌 것이다. 잊힌 이유는 무엇인가? 부자가 하느님과 이웃에 대해 도무지 관심도 없고 잘 알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부자는 가난한 라자로가 그의 집 대문 앞에 누워 있었어도 항상 그를 외면했다.

이에 대해 어떤 사람은 이렇게 생각할지도 모른다. ‘성경이 말하는 부자에게는 모든 것이 그럴 수 있다. 하지만 나는 무엇을 가졌는가? 나는 가진 것이 그다지 없다. 때문에 실제로 사람들이 나를 부자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 자신에게 정직하게 물어보자. 우리 각자는 어떤 면에서는 부자가 아닌가? 어쩌면 나는 다른 사람보다 조금 더 총명하기에 누구에겐가 좋은 조언을 할 수 있지 않는가? 어쩌면 나는 감성이 조금 더 풍부하기에 공감 능력이 더 뛰어나지 않는가? 어쩌면 나는 다른 사람들에게 봉사하는 데에 더 탁월하지 않는가? 이렇게 보면, 모든 사람은 타인보다 더 나은 점이 있기 때문에 어떤 의미에서는 부유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다. 때문에 우리 각자는 자신의 집 대문 앞에 가난한 라자로가 누워 있다는 것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우리 각자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런데 성경이 말하는 라자로는 누구인가? 라자로는 하느님께서 도와주시는 사람이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는 가난한 라자로를 그냥 지나치실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떤 사람이 하느님을 도대체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가?” 하고 묻는다면, 이렇게 대답해야 한다. “바로 가난한 라자로 곁에서 하느님을 찾을 수 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는 라자로의 하느님이시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는 특별한 방식으로 라자로와 일치하신다.

라자로는 어떤 면에서 삶의 한계에 이르러 있으며, 이제 스스로의 힘으로는 어찌해볼 수 없는 사람을 가리킨다. 우리는 라자로를 늘 바라보고 있지만,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지 않는다. 우리에게 그가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라자로는 우리를 필요로 하고, 우리 도움의 손길을 간절히 기다린다. 그래도 우리는 그를 인정하지도 받아들이지도 않는다. 라자로는 정말 우리 곁에 아주 가까이 있지만, 이를 우리는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다. 달리 말하면, 라자로는 우리에게 정말 가장 가까이 있다. 내 아내, 내 남편, 내 자녀, 내 조부모 등이 바로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라자로가 아닌가! 그들이 바로 우리 앞에 누워 있지 않는가! 그들은 너무 지친 나머지 이제는 기력이 쇠진하여 아주 나지막이 도와달라고 외치고 있지 않는가!

하지만 우리 자신도 바로 라자로가 아닌가? 왜냐하면 우리 모두에게는 사람들이 우리 자신을 받아주고 인정해주기를 바라는 깊은 갈망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면에서 우리 모두는 라자로이다. 우리 모두의 마음 깊은 곳에는 소리 나지 않는 눈물이 끊임없이 흐르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는 하느님 앞에서 실제로 라자로이다. 우리 모두는 그분의 자비, 그분의 인내, 그분의 사랑, 그분의 용서를 필요로 하고, 그로부터 살기 때문이다.

모든 인간은 부자이며 동시에 가난한 라자로이다. 이러한 것을 깊이 깨닫는 곳에서 형제애가 실현된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의 빛이 비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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