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백합 제75호(겨울) 신앙의 오솔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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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백인 세실리아 작성일21-12-02 11:59 조회691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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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화살을 맞은 자만이 그 힘을 안다.”
1.잘못을 자백하는 간디
마하트마 간디Mahatma Gandhi(1869-1948)는 자서전에서 십대 초반에 저지른 잘못을 몇 가지 고백했다. 그는 부모 몰래 담배를 피웠는데 그 담배를 사기 위해 집안의 나이 많은 하인의 주머니에서 동전을 훔쳤고, 한때 나쁜 친구들과 얽혀서 못된 일에 가담하였는데 이에 필요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형님 주머니에서 금화 몇 개를 훔친 일 등이 그것이다.
그런데 후자의 도둑질에 대해 간디는 유독 양심의 가책을 크게 느꼈다. 자신을 착한 아들로 믿고 있었던 부모를 속였다는 양심의 가책이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그를 괴롭혔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든 꾸지람과 처벌을 받을 각오를 단단히 하고 자백하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간디는 지금까지 부모에게서 체벌을 당한 적이 없었던 데다 그 자백으로 인해 자신을 믿었던 아버지가 크게 낙심하여 지울 수 없는 마음의 상처를 입을 것이라는 두려움과 걱정 때문에 망설였다. 차마 얼굴을 마주하고 직접 고백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도 자백하지 않고서는 더 이상 깨끗하게 살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느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자신의 잘못을 종이에 써서 부모에게 전달하기로 했다.
당시 병상에 누워 있던 간디의 아버지는 떨리는 손으로 내미는 아들의 ‘자백문’을 받아들고, 병상에서 몸을 일으켜 천천히 읽어내려 갔다. 그 글에는 아들이 금화를 훔쳤다는 사실과, 어떤 처벌이든지 죗값으로 달게 받겠다는 것, 앞으로는 도둑질 같은 짓을 절대 하지 않겠다는 약속, 아들의 잘못 때문에 아버지가 자책하시지 않기를 간절히 바란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아버지의 얼굴은 잠시 일그러졌지만 이윽고 구슬 같은 눈물이 흘렀고, 그 ‘자백문’ 종이를 적실 정도였다. 마주 앉아 있던 간디도 흐느껴 울었다. 간디의 아버지는 잠시 깊은 생각에 잠기며 눈을 감았다. 그런 다음 그 ‘자백문’ 종이를 죽죽 찢어버렸다. 그리고는 아픈 몸을 다시 병상에 뉘었다.
당시 간디는 아버지가 크게 분노하여 분명 화를 낼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예상과 달리 말없이 눈물을 흘리면서 침착과 고요를 유지하였다. 이에 대해 간디는 자신의 자서전에서 이렇게 고백한다. “그 사랑의 구슬방울들이 내 양심을 정화시켰고, 내 죄를 씻어 버렸다. 그러한 사랑을 경험한 사람만이 그것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찬송가에 있는 대로, 사랑의 화살을 맞은 자만이, 그만이 그 힘을 안다.… 나는 내 고백이 아버지로 하여금 내게 대하여 절대로 안심하게 하였고, 내게 대한 사랑을 더 무한히 더하게 했다는 것을 안다.” 당시 간디는 아버지의 눈물이 그저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의 눈물인 줄만 알았지만, 나중에 그가 깨달은 것은 그 눈물이 모든 것을 품고 감내하며 변화시키는 깊고도 신비한 비폭력이었다는 것이다.
2.죽으면서 살인자를 용서하는 간디
마하트마 간디가 누구인지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우리는 그의 금욕주의, 인류애와 해방운동, 비폭력 저항주의 등을 알고 있다. 그는 1948년 어떤 저녁 기도회에 참석했다가 급진적인 힌두교인이 쏜 총에 맞아 죽었다. 간디는 땅에 쓰러져 죽어가면서 살인자의 얼굴을 보려고 했지만 결코 보지 못했다. 그때 간디는 이미 맥이 풀려버린 손을 자신의 가슴과 얼굴을 거쳐 이마에 올려놓았다. 이는 화해의 표시였다. 이것이 간디가 이 세상에 남긴 마지막 행동이었다.
‘마하트마’의 이름은 본래 간디의 이름이 아니라, 사람들이 그에게 부여한 존칭이다. 그 뜻은 ‘위대한 영혼’이다. 사실 그러한 방식으로 타인을 용서할 수 있는 사람은 항상 위대한 영혼으로 칭송을 받는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그렇게 용서할 수 있을까? 어쩌면 우리도 우리의 잘못을 용서받아 진정한 기쁨을 누리는 화해의 손길을 체험할 때에 비로소 타인을 기꺼이 용서할 수 있을 것이다. 어쨌든 간디의 삶에서는 그랬다. 그는 특히 자기 아버지에게서 위대한 영혼을 체험했기 때문에 위대한 영혼을 지닐 수 있었다.
마하트마 간디가 체험했던 내용들은 곰곰이 생각할 만한 가치가 있다. 예를 들어 우리 삶에도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양심의 가책을 주는 큰 잘못이 있다는 사실이 그 하나이다. 혹은 명확하게 고백하지 않고서는 죄악에서 깨끗해질 수 없다는 생각도 그것이다. 자신의 잘못을 고백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으며 거기에는 항상 여러 이유들이 있는데, 특히 이겨내기 힘든 저항이 있다는 것도 곰곰이 생각해 볼만하다.
소년 간디의 체험을 조금 더 생각해보자. 그는 두려움에 사로잡힌 채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자백문을 아버지의 손에 맡겨드렸는데, 예상과는 달리 아버지의 놀라운 사랑을 체험하였다. 자신의 잘못을 진심으로 뉘우치며 아버지께 모든 것을 고백했을 때, 아버지의 자비로운 사랑이 한층 고조되는 것을 체험했던 것이다. 그때 간디는 복음의 “되찾은 아들”(루카 15,11-32)처럼 ‘자신은 자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을 받는 존재’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간디는 어찌할 바를 모르며 이렇게 고백했다. “그러한 사랑을 경험한 사람만이 그것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찬송가에 있는 대로, 사랑의 화살을 맞은 자만이, 그만이 그 힘을 안다.” 그러니까 반작용의 모든 형태를 뛰어넘는 순수하고도 무한한 사랑이 분명 존재하는 셈이다. 이러한 사랑은 기계적이 아니라 창조적으로 작용한다.
우리가 이러한 사랑을 하느님의 사랑과 관련지어 생각하면 더욱 풍요롭게 이해할 수 있다. 하느님의 사랑과 비교하면, 인간의 사랑은 그것이 최상의 형태일지라도 항상 풋내기에 불과하다. 달리 표현하자면 인간의 사랑과 하느님의 사랑은 숫자 1과 무한과 같다고 비유할 수 있다. ‘그대는 그대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을 받는 존재이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 메시지의 핵심이다. 그 어떠한 일에도 불구하고 그대는 사랑받고 있다는 것이며, 그대의 삶에 있는 모든 어둠에도 불구하고 사랑받는 존재라는 것이다.
3.하느님은 우리의 죄를 어떻게 대하시는가?
그럼, 하느님은 우리 인간의 죄를 어떻게 대하시는가? 이 물음에 대해서도 우리는 비유로만 대답할 수 있다. 간디의 아버지가 아들의 잘못을 적은 종이를 죽죽 찢어버렸듯이, 하느님께서도 우리 죄를 없애신다. 이사야 예언서는 이렇게 말한다. “저의 쓰디쓴 쓰라림은 행복으로 바뀌었습니다. 당신께서는 멸망의 구렁텅이에 빠지지 않게 제 목숨을 지켜 주셨습니다. 정녕 저의 모든 죄악을 당신의 등 뒤로 던져 버리셨습니다.”(이사 38,17) 예언자 미카도 비슷하게 언급한다. “허물을 용서해 주시고 죄를 못 본 체해 주시는 당신 같으신 하느님이 어디 있겠습니까?… 당신께서 저희의 모든 죄악을 바다 깊은 곳으로 던져 주십시오.”(미카 7,18-19)
따라서 성경의 믿음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한다. 우리를 향해 두 팔을 벌리신 하느님의 품에 우리의 삶을 있는 그대로 내맡겨드리라는 것이다. 이는 어린이처럼 무조건적인 신뢰를 지닌 사람만이 행할 수 있다. 이런 식으로 믿는 사람은 새롭게 살 수 있다. 그는 자기 자신과 새로운 관계를 맺는다. 그의 내적 갈등과 충동은 사라진다. 깊은 외로움도 없어진다. 하느님이 그를 용서하시기 때문에, 그는 자기 자신과 화해할 수 있다. 이러한 진리는 특히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는 사람에게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과 화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자신의 선한 의지를 자꾸만 망가트리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해소되지 않은 죄책감은 영적 우울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인간은 하느님과 화해할 때 자기 자신과 화해할 수 있다. 하느님에게서 받아들여졌다고 느낄 때 자기 자신을 받아들일 수 있다. 용서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은 죄악에서도 우리가 선善을 행하도록 도와주시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우리 자신이 얼마나 보잘것없는 존재이며, 때문에 우리 자신을 지탱해주시고 붙잡아주시는 하느님의 손길이 우리에게 얼마나 필요한지를 의식하게 도와주기 때문이다.
화해를 숙고하는 이 자리에서 떠오르는 생각이 하나 더 있다. 그것은 인간이 자기 자신을 정화할수록 그만큼 이웃을 더 관대하게 대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자기 자신과 깊이 일치하고 있기 때문에, 그에게는 이웃의 관점에서 이웃을 깊이 이해하는 가엾은 마음이 자란다. 이 가엾은 마음은 모든 화해의 영혼이다.
여기에서 사랑은 모든 원한을 극복하는 창조적 사건이라고 말할 수 있다. 마음속에 있는 증오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오히려 정반대이다. 증오는 상황을 더 악화시킨다. 이에 비해 용서하는 사랑은 새로운 미래를 향해 함께 걷는 길을 연다. 따라서 인간은 용서하거나 용서받는 일에서만큼 하느님과 비슷해지는 곳도 없다.
용서에 관한 이 글을 프란치스코 교황의 다음 말씀으로 마무리하자. “하느님의 무한한 자비로 용서받은 죄인이라는 인식이 있을 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형제적 화해의 구체적인 몸짓을 건넬 수 있습니다. 자신이 용서받은 죄인임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결코 용서나 화해의 행동을 하지 못합니다. 용서는 자신이 용서받은 죄인이라는 사실을 느끼는 마음에서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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