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말씀

2024.11
01
메뉴 더보기

메시지

2018 성탄메시지

페이지 정보

작성자 백인 세실리아 작성일18-12-28 13:08 조회2,661회 댓글0건

SNS 공유하기

본문

[2018년도 성탄메시지]

아기가너희를 위한 표징이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어두운 세상에 구원의 빛이 되시기 위하여, 오늘 하느님께서 우리 곁에 태어나셨습니다. 예수님 탄생을 진심으로 축하드리며, 아기 예수님의 사랑과 축복이 교우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에 풍성하게 내리기를 빕니다.

천사는 구세주 탄생 소식을 이렇게 알립니다. “너희는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를 보게 될 터인데, 그것이 너희를 위한 표징이다.”(루카 2,12) 초라한 구유에 누워계신 힘없는 아기 예수님이 인류가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구세주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하느님을 알아보는 표징이며, 그 외에 다른 표징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끊임없이 예수님께 다른 표징을 요구했습니다. “스승님, 스승님이 일으키시는 표징을 보고 싶습니다.”(마태 12,38) 사실 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들과는 달리 권위 있게 가르치시고 병자를 고쳐주시고 죽은 사람을 다시 살리시는 등 이미 놀라운 일을 많이 보여주셨습니다.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더 강력하고 더 분명한 표징을 요구했습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초월적인 특별한 표징을 보여주신다면,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믿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음이 완고한 사람들도 더 이상 방황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포악한 헤로데도 승복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권능이 충만하게 드러나는 놀라운 표징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믿지 못하겠다는 것입니다.

표징 요구는 평범한 사람들에게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선구자로서 거룩한 삶을 살았던 세례자 요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요한은 감옥살이를 할 때,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전해 듣고서 혼란스러웠습니다. 자꾸만 의심이 밀려와 제자들을 보내어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아니면 저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마태 11,3) 그도 큰 표징을 요구했던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도 더 큰 표징을 요구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런 표징 요구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요나의 표징만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마태 12,39 참조). 요나가 사흘 밤낮을 큰 물고기 배 속에 있었던 것처럼 당신도 사흘 밤낮을 땅속에 있을 것이라는, 곧 당신의 십자가 죽음이 표징이라는 것입니다. ‘악하고 절개 없는 세대에게는 다른 표징이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십자가의 표징은 강생의 표징과 일맥상통합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당신 자신을 낮추셨듯이, 강생에서도 당신 자신을 비우셨기 때문입니다(필리 2, 6 이하 참조). 그래서 어떤 교부는 이 둘의 관계를 이렇게 말합니다. ‘십자가의 자기낮춤은 강생에서부터 시작되며, 강생의 자기낮춤은 십자가에서 비로소 완성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에게는 하느님의 온전한 자기낮춤이 진정한 표징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왜 하느님께서 이토록 당신 자신을 낮추셨을까요? 어찌하여 힘없는 갓난아기가 되셨을까요? 그분이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모든 사람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모든 사람을 하나도 잃지 않고 남김없이 구원하기를 바라시기에(1티모 2,4 참조) 당신 자신을 낮추셨습니다. 그분은 특히 가난한 사람, 작은 사람, 연약한 사람, 비천한 사람을 사랑하시기에 힘없는 아기가 되셨습니다. 우리를 부요하게 하시려고 가난하게 되셨습니다(2코린 8,9 참조). 하느님의 자기낮춤은 우리의 모든 가난과 고통, 환난과 연약함 그리고 비천함을 그분이 한없이 사랑하시는 결과입니다. 그분의 자애로운 사랑에서 비롯됩니다.

바로 이것이 모든 사람이 기다렸던 메시지이며 표징입니다. 모든 사람은 하느님의 자애로운 사랑, 곧 자신의 연약함을 받아주시는 하느님, 자신의 보잘것없는 부분을 보듬어주시기 위하여 당신 자신을 낮추시는 하느님을 간절히 찾고 있습니다. 이것은 마음이 완고한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비록 하느님을 멀리 하고 있을지라도 실제로는 마음 깊은 곳에서 그런 사랑을 갈망하고 있습니다.

성탄은 이런 지극히 자애로운 사랑을 선포합니다. 구유에 누워계신 아기를 바라봅시다. 보잘것없는 우리를 사랑하시어 아기가 되신 하느님을 유심히 바라봅시다. 그러면 그 사랑을 충분히 느낄 수 있습니다. 오늘은 하느님께서 먼저 우리를 찾아오신 날입니다. 오늘은 우리가 하느님께 선물을 드리는 날이 아니라 그분이 주시는 선물을 받는 날입니다. 오늘은 우리가 애써 하느님을 사랑하는 날이 아니라 그분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날입니다. 그러니 그분이 우리를 찾아오시어 온갖 선물과 함께 사랑을 한없이 베푸실 수 있도록, 우리의 마음을 그분께 활짝 열어드립시다.

교우 여러분, 힘없는 아기 예수님에게서 당신 자신을 작게 하시는 하느님의 심오한 사랑을 깨달읍시다. 그러면 우리도 어려운 이웃을 위해 우리 자신을 낮출 수 있습니다. 연약한 이웃을 자애로운 사랑으로 껴안을 수 있습니다. 때로는 억울한 일이 있어도 자애와 온유를 끝까지 지킬 수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성탄의 신비를 계속 실현하고, 하느님의 표징을 계속 나타낼 수 있습니다.

다시 한번 성탄을 축하드리며, 고단한 삶을 사시는 교우 여러분에게 아기 예수님의 사랑과 축복이 가득 내리시어 희망과 평화가 넘치는 새해를 맞이하시기를 빕니다.

 

 


Warning: Use of undefined constant php - assumed 'php' (this will throw an Error in a future version of PHP) in /home/jcatholic/www/skin/board/bishopkim/view.skin.php on line 16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