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대
2010년도 사목교서 - 대희년 10주년을 맞이하며
본문
교형자매 여러분!
2천년 대희년을 맞이하면서 우리는 <대희년 특별사목교서>를 발표한 바 있습니다. 그것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채택한 주요 정책을 그대로 받아들인 것이었는데 구체적으로는, 성서, 전례의 활성화, 선교, 환경, 생명, 사회복지, 북한돕기, 외국인, 장묘문화 개선 등을 활동목표로 설정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 지난 10년 동안 우리는 해마다 사목교서에서 이 가운데 특정 과제나 분야를 강조하면서도 대희년 특별사목교서에서 이미 밝힌 정신대로 다른 과제들도 계속 추진해야 한다는 점을 늘 강조해 왔습니다.
그렇게 해서 10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또 하나의 특별 사목교서가 필요함을 느낍니다. 그것은 좁게는 우리 교구가, 넓게는 전 세계 가톨릭 교회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채택한 정책과 방향을 어떻게 실천해 왔는지를 돌아보고, 그것을 바탕으로 하여 적절한 방향을 찾는 방식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 교구로 좁혀 생각하자면, 2천년 특별 사목교서에서 제시한 방향 및 정책을 두고, 먼저 그것을 그 동안 어떻게 실천해 왔는지를 돌아보고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찾아야 하겠습니다.
1. 지난 10년을 돌아보며
가. 새 교구청
새 교구청 신축사업이 이 기간 동안에 이루어져서, 그 동안 공간적 제약 때문에 미루어두었던 여러 가지 교구의 일들을 원활하게 추진할 수 있게 된 것은 참으로 뜻 깊은 일입니다.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교구민 전체의 힘으로 이루어진 이 큰 일은 우리 교구의 역사에서 길이 남을 것입니다. 우리 교구민에게 마음의 고향과 같은 치명자산 자락에 널찍한 터를 잡고 세워진 새 교구청은 단순히 교구 행정의 중심으로뿐만 아니라, 우리가 이 일을 추진하면서 지녔던 꿈처럼, 우리 교구 영성의 샘으로서 세월이 갈수록 그 모습이 뚜렷해 질 것입니다. 이렇게 마련된 새 교구청을 중심으로 우리는 이제 주님께서 맡겨 주신 사명을 더 활발하게 수행할 수 있게 된 것을 모든 교구민과 함께 기뻐하며 감사드립니다.
나. 성서 사도직
먼저, "하느님의 말씀은 교회에게는 버팀과 활력이 되고, 교회의 자녀들에게는 신앙의 힘, 영혼의 양식 그리고 영성생활의 순수하고도 영구적인 원천이 되는 힘과 능력이 있다"(계시 헌장, 21항)고 선언하고, "성서를 모르는 것은 그리스도를 모르는 것이다"라고 단언하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가르침에 따라, 우리가 그 동안에 기울여 온 노력은 어떤 결실을 맺었는가?
그 동안 사목자들과 신앙인들의 꾸준한 노력으로, 이 분야에서 이룬 변화는 참으로 놀랄만 한 것이었습니다. 몸은 지치고 마음은 각종 걱정과 근심에 짓눌려 절망 상태에서 오랜 세월을 살던 이들이 그 어두움의 터널을 뚫고 하느님 말씀에서 새로운 빛과 힘을 얻었습니다. 겉으로는 별 문제 없는 듯하지만, 실상 내면에서는 삶의 방향과 의미를 잃고 그럭저럭 살아가던 이들이, 하느님 말씀 안에서 분명한 방향과 빛을 찾아내어 새 삶을 얻었습니다. 저 자신을 포함해서 많은 사목자들은 하느님의 말씀이 사람들 속에서 이루어내는 이 놀라운 변화를 보며,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더 날카로운"(히브 4,12) 그 능력을 새삼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맡겨 주신 영혼들을 어떻게 돌보아야 할지, 그들에게 무엇이 참으로 필요한지를 알게 되어, 사목자로서의 소명과 감각을 다시 찾아내고 큰 보람과 기쁨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런 바탕 위에, 바오로 해를 지내면서 그 동안 성서에 기울여 온 정성과 열정을 더욱 키우고 확장하였습니다. 그리고 2009년 6월 29일 바오로 해 폐막 미사는 그 모든 일을 하느님께 봉헌하고 우리가 함께 노력해온 그 동안의 과정을 일단 정리하여, 우리가 어디에 와 있는지를 보고 확인하는 자리였습니다. 그 날 함께 봉헌한 미사의 말씀과 성찬을 통해서 우리는 부활하신 주님께서 말씀과 빵의 모습으로 우리와 함께 계심을 생생히 체험할 수 있었고, 그런 의미에서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에게 일어난 일이 우리에게 그대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동시에 이 분야에서 우리가 노력해야 할 방향이 어디인지도 분명히 알게 되었습니다.
더욱이 본 주교로서는 2008년 10월 로마에서 하느님 말씀을 주제로 열렸던 세계주교대의원회의에 참석하여,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계시헌장 반포 이후 성서 관련 최대 사건이었던 이 기회에 또 한 번의 큰 자극과 은총을 받았습니다. 지난 공의회 이후 전 세계에서 들불처럼 번지고 있는 하느님 말씀에 대한 열기와 사랑에 관해 현지 주교님들에게서 직접 들으며, 앞으로 해야 할 일들에 관해서도 새로운 빛을 얻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회의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오늘 여기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전하기 위해서 성서에 바탕을 둔 사제들의 강론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주교님들이 특별히 강조하셨습니다.
다. 전례의 활성화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전례는 교회의 활동이 지향하는 정점이며 동시에 거기에서 교회의 모든 힘이 흘러나오는 원천"(전례헌장 10항)이라고 선언하고, 따라서 하느님 백성의 "완전하고 능동적인 참여를 위하여 최대한의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전례헌장 14항)고 가르칩니다.
그래서 성서 봉독자, 성가대, 미사해설자, 복사, 회중 등 미사를 함께 봉헌하기 위해서 각자가 맡은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전례 연수회도 그 중의 하나였습니다. 그 결과 전례 안에서 이루어지는 성서 봉독이 크게 개선되었습니다. 먼저 적절한 사람을 선정하여 굳은 믿음을 가지고 천천히 또박 또박 소리 높여 선포하게 함으로써, 생명 없는 글자가 성령을 통해 살아있는 하느님의 말씀으로 변화되는 것을 모두가 느낄 수 있게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미사해설자가 필요할 때 최소로만 개입함으로써 전례가 자연스럽게 흘러갈 수 있게 하고, 목소리도 약간 높여 전례 전체의 분위기를 기쁨에 찬 것이 되게 하는 일에도 큰 진전이 있었습니다. 성가대도 전례헌장의 정신에 따라 노래를 통해 드리는 회중의 기도를 활기차고 생생하게 만드는 일에 큰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미사의 분위기가 부활하신 주님을 기리고 맞이하는 생명의 잔치로 많이 바꾸어지고 있습니다.
또 사제들의 강론도 공의회의 가르침에 따라 성서의 흐름을 따라 가며 그날 봉독한 대목에 충실한 말씀으로 크게 변화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사제들은 이른 바 정치, 경제, 사회 등 빵 혹은 물질을 둘러싸고 있는 문제들이 아무리 심각하고 급박해 보여도, 그 방향으로 온 관심을 몰아가려는 사탄의 유혹에 대항하여, "사람이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마태 4,4)는 성서 말씀으로 그것을 이겨내신 주님의 모범을 따라, 사람들의 깊은 갈증에 응답하기 위해 더욱 분명한 노력을 기울이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것을 구하여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마태 6,33) 하시는 말씀대로, 사람들의 제일 큰 관심사들을 두고 중요성의 순서를 혼동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하면 초대교회 공동체처럼, 현세적이고 물질적인 생활에까지 그 결과가 자연스럽게 따르게 된다는 점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라. 선교운동
우리 신앙생활의 중심이며 대표적 표현이기도 한 미사가 참으로 부활하신 주님을 기리고 그 생명이 우리 안에서 살아 움직이게 하는 모습으로 봉헌된다면, 한 번 성당에 발을 들여 놓은 사람이면, 그 매력에 빠질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우리는 확신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을 신앙에 초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일은 이미 시작되었고 여러 곳에서 큰 결실을 내고 있습니다. 이제는 단순히 믿지 않는 분들을 초대하는 정도에서 그치지 않고, 그분들에게 새로운 신앙의 세계에 눈을 뜨도록 돕는 일, 전통적인 표현을 따르자면, 예비신자 교리도 교우들 자신이 하게 되었습니다. 이를 위해 우리 교구가 공식적으로 채택한 예비자 교리서가 <함께하는 여정>입니다. 이 교재의 특성이자 장점은 내용보다 그 방법에 있습니다. 예비자 모집 때부터 전과는 전혀 다를 수 있습니다. 앞으로 예비자들이 그 과정을 끝낼 때까지 "함께 해 줄" 기성 신앙인 자신이 예비자들을 모집해 오는 것입니다. 그런 다음 최소 3명이나 4-5명이 한 반이 되면, 그 동반자가 그들과 함께 앉아서 교재에 나와 있는 순서대로 진행해 나가는 것입니다. 여기서는 가르치는 사람이 따로 있고 배우는 사람이 또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그저 교재의 순서를 따라 가기만 하면, 배워야 할 내용을 습득하게 되고, 무엇보다도 예비자 자신이 첫 시간부터 입을 열어 기도도 하고, 그날의 주제에 따라 자기의 생각을 발표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성서 대목을 함께 읽고 묵상하며 나누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이 교재의 정신과 방법을 제대로 따르기만 하면, 예비 신자는 사람에게서뿐 아니라 성령에게서도 적절한 인도를 받아 참된 신앙인으로 성장해 갈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하느님의 자녀로 되어 가는 과정을 함께 걸어온 동료들과 그들을 도와 같은 여정을 밟아 온 기성 신자가 다 같이 따뜻한 유대로 묶여져 참된 형제자매가 됩니다. 이 유대는 앞으로도 계속 그들을 묶어 서로에게 격려와 도움을 주게 됩니다. 이 일에는 최소한의 교육을 받으면 누구나 참여할 수 있지만, 특히 교구 교리신학원에서 정규 교육을 받은 이들은 여기에서 더욱 확실하고 효과적인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교회 곧 우리 신앙인이 이 세상에 살고 있는 것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을 사람들에게 전하여, 그들이 참으로 기쁘고 충만한 삶을 살 수 있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선교가 교회의 본질적 사명이라고 천명하였습니다.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이미 교회가 아니라는 말과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의 형편은 어떻습니까? 최근에 사목방문차 들렀던 한 본당의 예를 들어봅니다. 그 본당 관내에 개신교 110, 불교 12, 원불교 8, 기타 다른 종교 2 군데가 있었습니다. 모두 합치면 성당과 같은 역할을 하는 데가 125 곳이었다는 말이 됩니다. 보통 교구 하나에 해당하는 규모입니다. 거기에 우리 성당은 딱 한 군데만 있는 것입니다. 그 곳의 천주교 신자 비율은 5.6%여서 전국 평균의 약 반에 불과하였습니다. 도시 지역의 몇 본당을 제외하면 다른 본당들도 사정은 비슷합니다. 이런 통계를 보면 새삼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얼마나 많은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이제 그 동안 말씀과 전례로 무장한 우리가 새로운 각오로 이 선교 대열에 뛰어들면 우리는 놀라운 결실을 거둘 수 있을 것입니다. 특히 하느님 말씀으로 무장하고, 성령 체험으로 불타오르게 된 정예부대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양성하여 복음의 사도로 활동하게 해야 하겠습니다.
마. 사회생활
이렇게 해서 교회가 참으로 하느님 말씀으로 무장하고 성령의 빛과 힘으로 충만히 채워진 공동체가 되면, 주님께서 맡겨주신 사명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습니다. 교회는 자신을 위해서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비추고 건강하게 만들기 위해서 있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만일 소금이 짠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다시 짜게 만들겠느냐? 그런 소금은 아무데도 쓸 데 없어 밖에 내버려 사람들에게 짓밟힐 따름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산 위에 있는 마을은 드러나게 마련이다. 등불을 켜서 됫박으로 덮어 두는 사람은 없다. 누구나 등경 위에 얹어 둔다. 그래야 집 안에 있는 사람들을 다 밝게 비출 수 있지 않겠느냐? 너희도 이와 같이 너희의 빛을 사람들 앞에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 (마태 5,13-16).
지난 대희년 특별사목교서에서 대사회 활동 목표 혹은 분야로 설정한 환경, 생명, 사회복지, 북한 돕기, 외국인, 장묘문화 개선 등의 과제 가운데 몇 가지 분야에서는 많은 진전이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장묘문화를 예로 들자면, 시신을 화장하여 모시는 방법이 채택되어 큰 호응을 얻고 있습니다. 치명자산에 있는 교구성직자묘지도 새로 꾸며서, 거기 모셔져 있던 분들을 화장하여 합장묘 형태로 다시 모심으로써, 그 자리를 앞으로 오랫동안 더 쓸 수 있는 여유를 마련하였습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 사회에서 장묘문화가 나아가야할 방향을 선도하는 데에도 의미 있는 역할을 하게 되었습니다. 사회복지 분야에서도 여러 곳에 새로운 시설을 설립했거나 지자체로부터 위임받아 운영하고 있고 이를 지원하기 위한 후원회원의 수도 증가하고 있습니다. 외국인에 관해서는 그 사이 가장 극적인 변화가 있어서, 우리가 다른 나라에 가지 않아도 우리 지역을 찾아오는 외국인이 급속도로 불어나고 있습니다. 이들을 돕기 위해서 교구에서 이주민 사목부를 신설하고 신부님 두 분을 전담사제로 임명하였습니다. 그리고 후원회와 의료봉사단 등 이 일을 돕기 위한 지원체제도 더 갖추어지고 있습니다. 또 주거환경이 극히 열악한 분들을 돕기 위해 <사랑 짓는 요십이>가 설립되어 여러 곳을 대폭 수리하거나 신축하였습니다. 이 밖에도 교우들이 생명, 환경 분야 등에서도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지난 10년 동안 우리가 기울여온 이 여러 가지 노력과 이루어 낸 결과를 바탕으로, 우리는 이제부터 특별히 우리의 역량을 집중시켜야 할 분야를 생각해 봅니다.
2. 앞으로의 과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우리 신앙생활에 도입한 변화 중에서도, 밖에서 볼 때에나 그 깊은 의미로 볼 때 가장 크게 드러나는 것은, 성서를 대하는 우리의 태도와 성체성사 곧 미사 전례에 나타난 변화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아주 당연한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일생동안 이루신 일이 다름 아니라 바로 이 두 가지, 아니, 한 가지 실체의 두 가지 측면으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루가복음 24장은 그것을 잘 보여줍니다. 정치-사회적 이득 혹은 현세적 구원을 기대하며 예수님을 따라나섰다가 그분이 십자가 위에서 힘없이 죽어가시는 모습을 보고 실망하여 고향으로 돌아가던 제자들에게 뜻밖에도 주님께서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몸으로 나타나십니다. 그리고 당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그들의 눈을 단계적으로 열어 주십니다. 먼저, "유다인들에게는 비위에 거슬리고 이방인들에게는 어리석게 보이는"(1고린 1,23) 당신의 십자가상 죽음을 새롭고 깊은 눈으로 보게 해 주십니다. 이를 위해 주님께서는 "모세의 율법서와 모든 예언서를 비롯하여 성서 전체에서 당신에 관한 기사를 들어 설명해 주십니다"(27절). 그 때 제자들의 마음속에 일어난 감동은 어느 시대에나 성서를 제대로 해설하고 설명하는 사제들의 강론이 청중의 마음속에 불러일으키는 반응의 표본입니다. "길에서 그분이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나 성서를 설명해 주실 때에 우리가 얼마나 뜨거운 감동을 느꼈던가!"(32절).
성서의 깊은 뜻을 해설해 주심으로써 제자들의 마음속에 그처럼 뜨거운 감동을 일으키신 뒤에, 주님께서는 두 번째 단계로, "함께 식탁에 앉아 빵을 들어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나누어 주셨습니다"(30절). 이 때 제자들에게 일어난 일을 성서는 이렇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제서야 그들은 눈이 열려 예수를 알아보았다"(31절). 태어나면서부터 눈이 멀었다가 그리스도를 만나 눈이 뜨인 사람(요한 9,1-7), 그리스도인을 붙들러 나섰다가 도리어 그리스도에게 "붙들려"(필립 3,12 참조) 성령을 받고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떨어지면서 다시 보게 된"(사도 9,18) 바오로도 같은 체험을 하였습니다.
3.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
이 이야기는 언제 어디서나 그리스도교 신앙생활의 표본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도 이 구조와 순서를 그대로 따라서 "그리스도교 생활 전체의 원천이며 정점"(제2차 바티칸 공의회, 교회에 관한 교의헌장 11항)이요 "교회 신비의 핵심"(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회칙, 교회는 신비로 산다, 1항)인 성체성사 곧 미사를 드리고 있습니다. 미사에서 신앙인들은 먼저 성서 말씀을 듣고 사제의 강론을 통해서 그 깊은 뜻을 깨달아 성령의 힘으로 마음속에 감동을 받습니다. 그런 다음, 성찬례를 통해 그리스도의 몸으로 변화된 빵을 나누어 먹음으로써 부활하신 주님을 깊이 받아 모시고 그분과 하나가 됩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말씀과 빵의 모습으로 오시는 주님을 받아먹고 주님의 힘으로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필생의 과업이자 꿈으로 간직하고 그렇게 될 날을 향해 당신의 온 삶을 바쳐 준비하고 걸어가셨던 이상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당신 자신 안에 살아 움직이며 "성령 받은 이"라는 뜻의 그리스도 곧 메시아로서의 사명을 다할 수 있게 해 주는 그 힘, "위에서 오는 능력"(루가 24,49)을 제자들에게 그대로 전해주심으로써, 그들도 역시 "성령 받은 이" 곧 그리스도인이 되게 해주는 것을 당신 삶 전체의 마지막 목표로 삼으셨던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사람이 살아가는 힘은 밥에서만 얻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이라는 또 다른 밥이야말로 사람으로서 진정한 행복과 자유를 누리며 살 수 있게 해 주시는 힘의 원천이라는 사실을 온 몸으로 체험하게 해 주실 것이었습니다. "정말 잘 들어 두어라. 만일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지 않으면 너희 안에 생명을 간직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누릴 것이며 내가 마지막 날에 그를 살릴 것이다. 내 살은 참된 양식이며 내 피는 참된 음료이기 때문이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서 살고 나도 그 안에서 산다.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고 내가 아버지의 힘으로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의 힘으로 살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늘에서 내려 온 빵이다. 이 빵은 너희의 조상들이 먹고도 결국 죽어 간 그런 빵이 아니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이다."(요한 6,53-58)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힘으로 사시듯이, 우리도 그분을 먹으면 예수님의 힘으로 살게 됩니다. 예나 이제나 이 표현은 너무나 투박하고 거칠어서 "이 말씀은 듣기가 너무 거북하다. 누가 듣고 있을 수 있겠는가?"(새 번역 성경) 하며 깜짝 놀랄 수밖에 없는 면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그런 반응에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말씀하십니다. "내 말이 귀에 거슬리느냐? 사람의 아들이 전에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보게 되면 어떻게 하겠느냐? 육적인 것은 아무 쓸모가 없지만 영적인 것은 생명을 준다.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영적인 것이며 생명이다."(요한 6,61-63) 당신 자신 아버지 하느님의 힘으로 사시는 것과 같이 제자들도 당신의 힘으로 살게 하기 위해서는 아무리 큰 오해와 반발이 있어도 결코 물러설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한 삶을 온전히 바치신 그분의 사명은 바로 이 한 점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위에서부터 오는 힘", 능력은 본래 성령을 가리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는 에프렘 성인의 말씀을 인용하여 "성령의 힘으로" 그리스도의 몸이 된 이 빵을 받아먹음은 바로 그 성령을 먹는 것이라고 가르쳐 주십니다.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받아 모시는 영성체로써 그리스도께서는 또한 우리에게 당신 성령을 보내 주십니다." 에프렘 성인은 이렇게도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빵을 당신의 살아 있는 몸이라 부르셨고, 그 빵을 당신 자신과 당신 성령으로 가득 차게 하셨습니다. … 믿음으로 그 빵을 먹는 사람은 불과 성령을 먹는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 이 빵을 받아먹으십시오. 그 빵으로 성령을 먹으십시오. 이것은 진실로 내 몸이며, 내 몸을 먹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기 때문입니다"(에프렘, 성주간 강론에서).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기억하기 위해서 한 가지만은 꼭 하라고 당부하셨는데, 그것이 다름 아니라 제자들이 당신을 먹는 일이었습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전해 준 것은 주님께로부터 받은 것입니다.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날 밤에 빵을 손에 드시고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시고 '이것은 너희들을 위하여 주는 내 몸이니 나를 기억하여 이 예를 행하여라.'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식후에 잔을 드시고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다음 '이것은 내 피로 맺는 새로운 계약의 잔이니 마실 때마다 나를 기억하여 이 예를 행하여라.'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이 빵을 먹고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님의 죽으심을 선포하고, 이것을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하십시오."(1고린 11,23-26)
미사. 성체성사. 주님의 몸과 피를 먹고 마심. 어떤 말, 어떤 표현을 쓰든지 뜻은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을 놓치지 않으려면, 그분의 힘으로 살려면, 우리가 무엇보다 먼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이것입니다. 거기서 말씀과 빵의 모양으로 우리에게 오시는 주님을 먹고 내 생명 깊숙이 받아 모셔야만 나는 비로소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 이것이 빠지면 아무리 좋은 일을 한다 해도 그것은 인간적인 일, 하느님 보시기에는 헛수고일 뿐입니다. 이것이 들어가면, 아무리 사소한 행위라 해도 영원의 의미를 띠게 됩니다. 영원하신 분께서 하신 일에 끼어들어 하나가 되기 때문입니다.
4. <세계 위에서 드리는 미사>의 저자이신 떼이야르 샤르댕 신부님의 말씀에 따르면, 인간의 삶은 적극적으로 무슨 일을 하는 것(行爲)과 수동적으로 당하는 것(受苦)으로 이루어집니다. 밭에 나가 농사를 짓든, 부엌에서 음식을 준비하든, 사무실에서 사무를 보든, 연구실에서 탐구를 하든, 사람은 무엇인가를 하며 살게 마련입니다. 어떤 일, 행위를 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삶에는 각자가 흔히 자기 의지와는 상관없이 당하고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면도 있습니다. 적극적으로 하는 일과 소극적으로 당하는 일은 마치 들이쉬고 내쉬는 것으로 이루어지는 우리의 호흡처럼, 혹은 빛과 그림자처럼, 서로 떨어질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무슨 일을 하려면 반드시 수고가 따릅니다. 어떤 일을 할 때에는 몸이 피로하고, 시간이 소진되고, 다른 일을 희생시켜야 하는 등, 수고가 부산물처럼 따릅니다. 태어나고 성장하고 열매를 맺을 때가 있는가 하면, 열매는 떨어지고 노쇠하고 죽어야 하는 때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주님께서 사제의 입을 빌어 농부가 생산해 낸 빵 한 조각을 손에 드시고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다음 "이것은 내 몸이다" 하고 말씀하실 때, 그 말씀은 단순히 그 빵 조각만 그분의 몸으로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의미로는 물질세계에 살면서 적극적 행위를 통해 무엇인가를 이루어내는 인간들의 활동, 나아가 창조계 자체를 최종 목표인 창조주 하느님과의 합일을 향해 이끌어가는 우주적 움직임 전체도 그분의 몸으로 변화시키어 아버지께 드리는 제물로 만든다는 것입니다. 같은 이치로, 포도주 축성 때에는, 무슨 행위를 하든 필연적으로 따르는 수고를 포도주와 함께 예수님의 피로 변화시킨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런 사실을 믿고, 그것을 생각하면서 우리가 성체성사에 참여하면, 우리는 예수님의 몸과 피와 함께 우리의 삶 전체를 제물로 하여 하느님 아버지께 봉헌하는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 (세계 위에서 드리는 미사,<봉헌> 참조).
요한 바오로 2세는 1995년 당신의 사제서품 50주년을 맞아 "선물과 신비"라는 책을 내셨는데, 거기에서 현대의 이 대교황님은 떼이야르 신부님의 "세계 위에서 드리는 미사"가 자신의 사제직 수행에서 얼마나 큰 영향을 끼쳤는지를 밝히시며 이렇게 쓰셨습니다. "성체성사는 '떼이야르 신부님의 아름다운 표현대로, 세계 곧 땅덩어리를 제단 삼아 드림으로써 온 세상의 노동과 고통을 하느님께 제물로 바치는 것이다"(73쪽). 교황님께서는 2003년에 반포하신 회칙 <교회는 성체성사로 산다>에서도 떼이야르로부터 받은 영향을 분명히 나타내셨습니다. "성체성사를 생각할 때, 또 사제와 주교로서, 그리고 베드로의 후계자로서 지낸 삶을 되돌아 볼 때, 저는 자연스레 제가 성찬례를 거행할 수 있었던 여러 기회와 장소들을 떠올리게 됩니다. 제가 처음으로 본당 사목을 맡은 니에고비치의 성당, 크라쿠프의 성 플로리아노 대성당, 베벨 주교좌 성당, 성 베드로 대성전을 비롯한 로마와 세계 곳곳의 여러 대성전과 성당들이 기억납니다. 산길, 호숫가, 바닷가 등에 지어진 경당에서 거룩한 미사를 거행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운동장과 도시의 광장에 세운 제대에서도 미사를 거행하였습니다. 이렇게 다양한 장소에서 거행한 성찬례를 통하여 저는 성세성사의 보편적인 특성, 다시 말해 우주적인 특성을 강렬하게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참으로 우주적입니다! 성찬례는 시골 성당의 초라한 제대에서 거행될 때에도 어떤 면에서는 늘 세계 (곧 땅덩이)라는 제대에서 거행되기 때문입니다"(교회는 성체성사로 산다, 8항).
베네딕도 16세께서도 추기경 시절에 전례에 관해 쓰신 책에서 전례를 통한 예배와 창조의 관계에 관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예배의 목적과 창조계의 목적이 전체로서 하나이며 같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이 둘이 모두 신화(神化) 곧 자유와 사랑의 세계를 향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 말은 역사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이 우주 속에 나타난다는 뜻이다. 우주는 폐쇄된 구조물이거나, 정체되어 있는 그릇이 아니고, 따라서 역사는 그 안에서 우연적으로만 발생할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다. 우주는 한 점에서 시작하여 또 하나의 점인 끝을 향해 움직여가는 것이다. 그런 뜻에서 창조물 자체도 역사이다."
그리고 특히 떼이야르의 <세계 위에서 드리는 미사>를 높게 평가하시며 이 신부님의 생각을 이렇게 요약하셨습니다. "떼이야르는 계속해서 그리스도교 경신행위에 새로운 의미를 제공한다. 주님의 몸으로 변화된 제병(밀떡)은 그리스도께서 마지막 때에 당신 안에 온 만물을 받아들여 근본적으로 변화시키고 신화(神化)시키실 일을 앞두고, 그것을 어느 정도 미리 실현한다. 이런 뜻에서, 성체성사는 우주가 움직여 나아가는 데 있어서 그 방향을 부여한다. 그 움직임에 최종 목적지를 넌지시 지시해 주고, 동시에 그 쪽으로 움직여 가도록 부추긴다"(라찡어, 전례의 정신). 그리고 교황이 되신 다음 베네딕도 16세께서는 성체성사에 관한 세계 주교대의원회의 후속 교황권고 <사랑의 성사>에서 떼이야르의 같은 생각을 계속 천명하십니다. 예를 들면 이 문헌 47항에서 이렇게 선언하십니다. "우리가 제대에 바치는 빵과 포도주 안에서 구원자이신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피조물을 받아들이시어 변화시키시고 하느님께 바치십니다. … 인간의 활동은 성찬례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구원하시는 희생제와 일치를 이루게 됩니다."
이 문헌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가 몸담아 살고 있는 현실과 역사 그리고 사회 구조를 개선해 나가는 일에 있어서도 이 성찬 영성이 얼마나 큰 역할을 할 수 있는지를 가르쳐 줍니다. "성찬례 자체가 인류 역사와 우주 전체에 강렬한 빛을 비추어 줍니다. 이러한 성사적 전망에서, 우리는 교회의 모든 사건이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을 알려 주시고 우리를 일깨우시는 일종의 표징이라는 사실을 날마다 깨닫습니다. 따라서 삶의 성찬적 모습은 역사와 우주를 바라보는 우리의 사고방식에 참다운 변화를 불러일으키는 데에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전례 자체가 우리에게 이 사실을 가르쳐줍니다. 예물 준비 기도에서, 사제가 하느님께 빵과 포도주 위에 축복과 청원 기도를 바치며 '땅을 일구어 얻은 이 빵', '포도를 가꾸어 얻은 이 술' 이라고 말할 때에 그러합니다. 이 말씀으로 그 예식은 인간의 모든 노고와 활동을 하느님께 바칠 뿐만 아니라, 이 세상이 우리가 살아가는 데에 필요한 모든 것을 주도록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것임을 알게 해 줍니다"(사랑의 성사,92항).
여기서 우리는 베네딕도 16세께서 "삶의 성찬적 모습은 역사와 우주를 바라보는 우리의 사고방식에 참다운 변화를 불러일으키는 데에 도움이 될 수 있다"고 하신 말씀을 좀 더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현대 과학은 우주가 약 130여 억 년 전에 바늘 끝 같이 작은 한 점에서 시작된 대폭발에서 출발해서 긴 세월에 걸쳐 지금의 이 거대 우주가 만들어졌고 이 창조의 과정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고 가르쳐 줍니다. 오늘날 흔히 빅뱅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이 이론을 맨 처음에 주창한 사람은 교황청 과학학술원 회원이었던 러 메트르 신부였습니다. 그리고 이 이론은 현대의 많은 과학자들이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런데 현대 물리학이 발견해 낸 여러 가지 자료를 바탕으로 이런 이론을 생각해 낸 것은 러 메트르가 하느님의 창조설을 믿는 신앙인이라는 사실이 큰 역할을 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습니다. 과연 성서는 이 우주가 하느님께서 만들어내신 작품이라고 가르쳐주고, 성서의 마지막 권인 요한 묵시록은 하느님께서 우주 만물의 시작이요 끝, 그것을 만드신 분이시며 완성하실 분이라는 뜻에서 "나는 알파요 오메가다"(묵시 1,8) 하시는 그분의 말씀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우주의 시작이며 끝 곧 우주가 가고 있는 마지막 목표라면, 사람뿐 아니라 "모든 피조물은 하느님의 자녀가 나타나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다"(로마 8,19)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우리는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바오로 사도의 이어지는 말씀도 쉽게 이해가 됩니다. "곧 피조물에게도 멸망의 사슬에서 풀려나서 하느님의 자녀들이 누리는 영광스러운 자유에 참여할 날이 올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피조물이 오늘날까지 다 함께 신음하며 진통을 겪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피조물만이 아니라 성령을 하느님의 첫 선물로 받은 우리 자신도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날과 우리의 몸이 해방될 날을 고대하면서 속으로 신음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희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로마 8, 21-24).
하느님의 자녀, 곧 그분의 외아들이 이 세상에 오셔서 이 우주가 어디를 향해 가야 하는 지를 잘 보여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주 진행의 끝에 살지 않으면서도 지금부터 이미 그 끝을 알고 거기를 향해 달려갈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우주가 아주 단순한 구조에서 출발하여 단순한 것들이 <서로 하나가 되는 과정>을 거쳐 이렇게 복잡하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진화해 왔다고 과학은 가르쳐줍니다. 이렇게 우주는 점점 더 깊고 넓은 의미의 <하나가 되는 방향>으로 발전해 왔는데, 그 <하나 됨>은 다름 아닌 <사랑> 이라고 떼이야르는 말합니다. 그리고 이 우주 공간에서 가장 고급의 <사랑화>에 도달한 인간이야말로 그런 의미에서도 만물의 영장이며, 주님께서 몸소 보여주시고 인간들에게 새 계명으로 주신 사랑은 바로 이 우주 진화의 방향을 가리켜 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는 너희에게 새 계명을 주겠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세상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요한 13,34-35). 이분 곁에서 가장 사랑을 많이 받았던 요한은 예수님과 함께 했던 삶을 돌아보며 크게 깨달은 것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해서 당신의 목숨을 내놓으셨습니다. 이것으로 우리가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형제들을 위해서 우리의 목숨을 내놓아야 합니다"(1요한 3,16). 이 "예수의 사랑을 받던 제자"(요한 13,23; 21,7; 21,20)는 이렇게 단언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 안에 있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있으며 하느님께서는 그 사람 안에 계십니다"(1요한 4,16).
5. 벗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고 말씀하시고, 십자가 죽음을 통해 보여주신 바로 그런 사랑을 기억하고 우리 온 존재 안에 받아들이기 위해서 우리는 오늘도 미사를 봉헌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미사는 성당 밖에서 드리는 부분과 성당 안에서 드리는 부분, 이렇게 두 부분으로 나눠집니다. 성당 밖에서 드리는 부분은 성당 안에서 드리는 부분을 중심으로 그 전과 후로 또 나눌 수 있는데, 그 전에는 미사 때 드릴 봉헌물을 준비하는 시간이고, 그 후는 미사의 열매를 사방에 나가 씨앗처럼 뿌리고 실천하는 시간입니다. 성당 안에서 드리는 부분에서도 "이것은 내 몸이다." "이것은 내 피다." 하는 사제의 말로 빵과 포도주를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화시키는 부분은 핵심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런데 앞에서 본 바와 같이, 우리 신앙인의 입장에서 보자면, 이 때 주님의 몸으로 변화되는 것은 제단 위에 올려진 빵과 포도주에만 국한되지 않고, 노동과 수고로 이루어지는 우리의 삶 전체도 그 변화 영역에 포함되기 때문에, < 예물 준비 기도>가 특별한 의미를 지니게 됩니다. 그 때에 사제와 함께 온 회중은 이런 기도를 바칩니다. 먼저 사제가 이렇게 기도합니다. "온 누리의 주 하느님, 찬미 받으소서. 주님의 너그러우신 은혜로 저희가 땅을 일구어 얻은 이 빵을 주님께 바치오니, 생명의 양식이 되게 하소서." 그러면 회중은 "하느님 찬미 받으소서." 하고 응답함으로써, 사제가 방금 바친 기도에 마음으로부터의 동의를 표현하며, 자신의 노동과 수고를 빵과 포도주에 섞어 하느님께 제물로 드리는 것입니다.
이 기도의 깊은 의미를 새겨봅시다.
여기서 사제는 빵을 손에 받쳐 들고 하느님을 온 누리, 우주 만물의 주인으로, 창조자로 고백하며 그분께 찬미를 드립니다. 지금 사제의 손에 들려 있는 빵은 창조주 하느님을 믿는 신앙인의 눈으로 볼 때 대단히 깊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선 온 우주가 동원되어 만들어낸 산물입니다. 아주 간단한 것들만 우선 생각해도 그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태양은 빛을 주고, 대기는 바다에 있던 수분을 실어다 비로 뿌려주었으며, 바람은 수분작용을 도와주었고, 공기는 숨을 쉬게 해 주었으며, 흙은 영양분을 제공했습니다. 조금 더 깊이 생각하면, 이 지구가 태양에서 조금만 멀리 떨어졌거나 조금만 가까웠어도 생명이 여기서 나타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또 달이 조금만 더 컸거나 작았어도 바다의 조수 간만의 차이를 적절히 만들어내지 못해서 생물이 살아가기가 힘들었을 것입니다. 이런 방향으로 생각을 계속 뻗치면, 여기 빵 한 덩어리가 제단에 올려지기 위해서는 수 만 가지 조건이 아슬아슬하게 맞아떨어져서 밀이 자랄 수 있었던 것을 깨닫게 되며, 따라서 무심히 지나칠 수 있는 빵 한 덩어리, 그것을 내기 위해서 땅에서 자란 밀 한 포기가 거의 무한한 공간 속에서 그야말로 우주적 기적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더구나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을만큼 고급 정신을 가지고 태어난 인간이 스스로를 보며 느끼는 신비감은 더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그러니 빵을 받쳐 들고 온 누리의 하느님께 먼저 감사와 찬미를 드리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주님의 너그러우신 은혜"가 있었기에 거기 빵이 제단에 올려지게 되었고,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 삶을 누릴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주, 대자연이 혼자서 빵을 만들어내지는 않았습니다. 우리 인간의 몫도 거기 끼어들어 빵을 만들었습니다. "땅을 일군" 것은 "저희"인 것입니다. 우주를 섭리하신 하느님과 우리의 합동작업이 이루어 낸 산물이 지금 빵으로 제단에 올려져 그리스도의 몸으로 변화되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앞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여기서 빵은 우리가 하루 종일 하는 모든 노동, 적극적인 행위 전체를 대표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밭에서 일하는 농부뿐 아니라, 사무실, 상점, 교실, 연구실, 관청 등, 일터가 어디이든지 간에, 우리의 모든 활동이 이 빵 안에 수렴되어 <예물 준비 기도> 때에 제단 위에 올려지는 것입니다.
이어서, 사제는 포도주 잔을 들고 기도합니다. "온 누리의 주 하느님, 찬미 받으소서. 주님의 너그러우신 은혜로 저희가 포도를 가꾸어 얻은 이 술을 주님께 바치오니, 구원의 음료가 되게 하소서." 그리고 회중은 조금 전과 같이 "주 하느님, 길이 찬미 받으소서." 하고 응답합니다. 여기서도 역시, 기본 뜻은 같습니다. 다만, 주님의 피로 변화될 포도주를 들고서는 적극적 행위나 노력 대신, 소극적 당함이나 수고를 제물 삼아 그리스도의 피와 함께 하느님께 봉헌하는 것입니다.
6. 교회 안에서 성찬례가 이처럼 결정적으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면 교회 구성원 전체가 여기에 얼마나 큰 정성과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인지는 두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특히 바로 이 성찬례에 그 이름과 실체의 뿌리를 두고 있다고 할 수 있는 <사제>들에게 그것이 얼마나 목숨처럼 중요한 것인지는 자명한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성찬례가 교회 생활의 중심이며 정점이라면, 그것은 또한 사제 직무의 중심이며 정점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충만한 감사의 마음으로, 저는 성찬례가 '성체성사 제정 때에 유효하게 생겨난 성품성사의 근본적이고 핵심적인 존재 이유'라고 되풀이하여 말합니다. 사제들은 광범위하고 다양한 사목 활동에 참여합니다. 현대 세계의 사회 문화적 상황들을 고려할 때, 우리는 사제들이 그처럼 많고 다양한 임무 속에서 중심을 잃어버릴 지극히 현실적인 위험에 직면해 있다는 것을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목자다운 사랑에서, 사제의 생활과 활동을 통합시켜 주는 끈을 보았습니다. 이 목자다운 사랑은 '주로 성찬의 희생 제사에서 흘러나오며, 따라서 성찬례는 모든 사제 생활의 중심이며 근원'(사제생활교령, 14항) 이라고 공의회는 덧붙입니다."
그렇습니다. 여기 인용한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의 말씀 가운데에서도 마지막 부분은 오늘날 우리 사제들의 고충과 빠져들 수 있는 위험을 날카롭게 지적해 줍니다. 과연 우리는 정치, 경제, 사회 상황의 복잡한 환경과 변화에 따라, 일의 중요성과 우선순위에 대한 감각을 잃고 문제의 바다에 빠져 표류할 수가 있습니다. "그처럼 많고 다양한 임무 속에서 중심을 잃어버릴 지극히 현실적인 위험에 직면해 있는" 것입니다. 이 위험에 빠지지 않고 주어진 사명을 제대로 실천하는 길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표현한 대로 목자다운 사랑입니다. 그리고 이 목자다운 사랑은 "주로 성찬의 희생 제사에서 흘러나오며, 따라서 성찬례는 모든 사제 생활의 중심이며 근원'(사제생활교령, 14항)" 이라고 공의회는 덧붙입니다.
7. 구체적 제안
이 모든 점을 생각하며, 우리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채택하고, 우리 교구가 2000년 특별 사목교서에서 밝힌 바 있으며, 지금까지의 숙고에서 생각해 온 것을 다음과 같이 요약하여 제시합니다.
가. 하느님 말씀
그 동안 성서 읽기, 쓰기, 외우기, 공부하기, 나누기 등 온갖 방법을 다해 하느님 말씀에 대한 우리의 정성을 다했습니다. 우리 교구가 공식 방법으로 채택한 <성서백주간> 등 많은 방법들이 읽기, 공부, 묵상, 기도, 나눔 등의 요소들을 잘 갖추고 있어서 하느님 말씀을 삶에 깊이 받아들이고 그 힘으로 생활에 큰 활력과 변화를 경험하는 이들이 대단히 많습니다. 그런데 성서 공부를 정식으로 시작하지 못한 이들이 아직도 상당히 있습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읽기, 쓰기, 외우기, 공부하기까지는 잘하고 있지만, 다른 이들과 함께 나누기까지는 아직 가지 못한 이들도 많습니다. 그런데 성서 공부와 묵상은 다른 이들과 함께 나누는 데에까지 가야만 성령의 불길이 활활 타오르고 그 효과가 제대로 나타납니다. "내가 다시 말한다. 너희 중의 두 사람이 이 세상에서 마음을 모아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무슨 일이든 다 들어 주실 것이다. 단 두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마태 18,19-20). 이 말씀은 특히 하느님 말씀을 함께 묵상하는 자리에 잘 어울리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하느님 말씀을 대하는 자세에서 우리 모든 믿는 이들의 모범이신 성모 마리아의 모습을 가슴에 모시고 그분의 뒤를 따라야 하겠습니다.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 속 깊이 새겨 오래 간직하였다"(루가 2,19). 사람들이 사는 동네에서는 방을 찾을 수가 없어, 짐승 우리에서 첫 아들을 낳아 짐승의 밥 그릇에 아기를 뉘어놓았을 때 일어난 모든 일들을 대하는 그분의 자세를 성서는 이렇게 전해 주고 있습니다. 귀로 듣는 말씀으로, 눈으로 읽은 글로, 혹은 삶에 일어나는 크고 작은 사건으로 우리에게 전해지는 하느님의 말씀을 대하는 마리아의 태도를 성서는 간단하면서 뜻 깊은 말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마리아께서 구세주의 어머니가 되신 것은 예수님을 몸으로 낳아주셨기 때문이라기보다 말이나 사건으로 건네지는 하느님의 말씀을 온 몸에 받아들여 거기에서 그것이 자라나 열매를 맺을 수 있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에서 우리는 그 점을 분명히 알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고 계실 때 군중 속에서 어떤 여자가 목소리를 높여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하고 예수님께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루가 11,27-28)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이렇게 비유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이 땅에 씨를 뿌려 놓았다. 하루 하루 자고 일어나고 하는 사이에 씨앗은 싹이 트고 자라나지만 그 사람은 그것이 어떻게 자라는지 모른다. 땅이 저절로 열매를 맺게 하는 것인데 처음에는 싹이 돋고 그 다음에는 이삭이 패고 마침내 이삭에 알찬 낟알이 맺힌다. 곡식이 익으면 그 사람은 추수 때가 된 줄을 알고 곧 낫을 댄다"(마르 4,26-29).
식물은 땅에 씨를 뿌리고 사람을 비롯한 동물은 몸에 씨를 뿌립니다. 씨를 뿌린 다음에는 새들이 와서 쪼아 먹지 못하게 지켜주고, 땡볕에 타죽지 않도록 흙이나 가림막으로 덮어주며 잡초에 숨막히지 않게 김을 매 줍니다. 그렇게 해서 잘 지켜주기만 하면 씨앗은 싹이 터서 자라나 열매를 거두는 데까지 땅의 힘만 빌어 스스로 성장합니다. 사람을 비롯한 동물의 씨가 자라는 과정도 마찬가지입니다. 여인이 사람의 씨앗을 받은 다음에는 그것이 손상되지 않게 몸 조심을 하고 영양분을 고루 섭취하며 잘 지켜주기만 하면, 뱃속에서 아기는 무럭무럭 자라나 마침내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여인이 아기를 임신하여 여러 달 동안 잘 지켜서 마침내 세상에 태어난 다음에는 젖을 먹여 기른 경험을 바탕으로 예수님을 낳아주신 어머니를 부러워하는 말을 듣고, 정말로 부러워할 사람이나 이유가 어디에 있는지를 분명히 가르쳐 주십니다. 사람의 씨앗을 받아 오랫동안 뱃속에 간직했다가 아기가 세상에 태어난 다음에는 젖을 먹였다는 의미에서 당신의 어머님이 행복하다기보다는, 당신의 어머니를 포함하여 이 세상의 누구라도, 당신의 말씀이라는 씨앗을 받아들여 오랫동안 잘 지켜주면, 다시 말해서 그 씨가 잘 자랄 수 있도록 보호해 주면, 그 씨앗이 자라서 열매를 맺을 것이고, 그런 사람이야말로 행복하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마리아께서 행복한 분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라는 의미가 넌지시 드러나는 말씀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2008년 세계 주교 대의원회의에서도 확인한 바와 같이, 마리아는 당신의 마음을 하느님 말씀의 도서관으로 만드셨을 뿐 아니라, 무엇보다도, 하느님 말씀이라는 씨앗이 뿌리를 내려 잘 자랄 수 있는 비옥한 토양으로 만드셨던 것입니다. 우리도 모두 같은 의미에서 자신의 온 존재를 하느님 말씀을 받아 잘 자라게 하는 좋은 토양으로 만들어야 하겠습니다.
나. 전례
전례헌장의 가르침대로, 모여온 하느님 백성이 하나도 구경꾼으로 머물지 않고 모두가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함께 이루는 전례가 되게 하기 위해서, 앞으로도 본당별로, 공동체 별로 많은 창의력과 상상력을 발휘하여, 미사 분위기를 한층 더 활발하고 생기 넘치는 것이 되게 합시다. 그렇게 하자면, 성서 봉독자, 성가대 책임자, 미사 해설자 등 전례 안에서 특별한 책임을 맡은 이들이 필요한 교육을 받아야 합니다.
다. 이 두 분야에서 이룬 성과
특히 대희년 이후 오늘날까지 말씀과 전례를 위해 온갖 정성을 쏟아 오신 사목자들의 노력으로, 우리 교구의 많은 본당들이 하느님 말씀에 대한 새로운 열정을 바탕으로 전례가 대단히 활성화하고 신자들의 생활에 큰 변화가 도입된 것은 참으로 기쁜 일입니다. 우리는 그 동안의 경험을 바탕으로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가 한층 더 기도하고 성령의 빛 속에서 함께 찾아감으로써, 하느님 말씀이 더욱 더 모든 신앙인들의 삶 속 깊숙이 침투해 빛을 주고, 성찬례를 통해서 부활하신 주님의 힘이 그 안에서 한결 더 활발하게 움직일 수 있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라. 사회생활
이렇게 해서 얻은 힘이 신앙인들을 통해서 이웃과 주변 사회에서 꽃피고 열매를 맺게 되어야 하겠습니다. 특히, 환경, 생명, 사회복지, 국내 외국인에 대한 형제적 배려 등 지금까지 추진해 왔던 일들을 한 결 더한 열정으로 계속해 나가야 하겠습니다.
마. 선교
그렇게 해서 우리의 모든 역량을 교회의 본질적 사명인 선교에 기울여야 하겠습니다.
8. 맺으며
<아버지>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죽었다가 부활하시어 지금은 특히 말씀과 빵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살아 계십니다. 그리고 살아계신 주님께서 이 말씀과 빵 속으로 들어오시어 거기 계시게 해 주시는 분은 <생명을 주는 힘이신 성령>이십니다. 약속하신 성령을 받았을 때, 제자들은 그것을 깨달았습니다. "그 날이 오면 너희는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과 너희가 내 안에 있고 내가 너희 안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요한 14,20). 성령이 오실 날을 약속하시면서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 예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우리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아 이미 <그날> 속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거기에 견진성사까지 받으면 우리는 세례를 완성하여 우리 안에서 성령의 불길이 활발하게 타오르게 됩니다.
이 일이 언제 어디에서나 계속되게 하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세워주시며 "나를 기억하기 위하여 이 예를 행하라"고 당부하신 것이 성체성사 곧 미사입니다. 이 미사를 구성하는 말씀과 성찬에 온 정성을 기울이면 우리는 성령의 빛과 힘을 가득히 받을 것입니다. 그리고 미사는 우리 각자가 사는 세상에서 드리는 부분과 성당에서 드리는 부분으로 이루어집니다. 세상에서 드리는 부분은 우리가 직장에서, 가정에서, 그 밖에 다른 일터에서 하는 모든 노동과 그 과정에서 겪는 수고로 이루어지고, 그것이 성당에서 드리는 미사 때에 빵과 포도주에 합해져서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화되어 하느님 아버지께 봉헌됩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가 세상에 살면서도 "이 세상에 속한 사람들이 아니게"(요한 17,16) 되면, 우리는 이제 세상에 나가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제, 수도자, 교우 등 하느님 백성 전체는 무엇보다 먼저 말씀과 성찬으로 이루어지는 성체성사를 삶의 중심에 놓고, 성당에서 드리는 미사를 제대로 봉헌하는 일에 모든 힘을 집중해야 하겠습니다. 거기서 빛과 힘을 가득히 받은 다음, 성당 밖, 우리가 사는 세상에 나가 주님의 도우심과 각자가 할 수 있는 노력을 다해 복음을 전하며, 세상을 밝고 건강하게 만드는 일에 몸을 바쳐야 하겠습니다.
2천년 대희년을 맞이하면서 우리는 <대희년 특별사목교서>를 발표한 바 있습니다. 그것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채택한 주요 정책을 그대로 받아들인 것이었는데 구체적으로는, 성서, 전례의 활성화, 선교, 환경, 생명, 사회복지, 북한돕기, 외국인, 장묘문화 개선 등을 활동목표로 설정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 지난 10년 동안 우리는 해마다 사목교서에서 이 가운데 특정 과제나 분야를 강조하면서도 대희년 특별사목교서에서 이미 밝힌 정신대로 다른 과제들도 계속 추진해야 한다는 점을 늘 강조해 왔습니다.
그렇게 해서 10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또 하나의 특별 사목교서가 필요함을 느낍니다. 그것은 좁게는 우리 교구가, 넓게는 전 세계 가톨릭 교회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채택한 정책과 방향을 어떻게 실천해 왔는지를 돌아보고, 그것을 바탕으로 하여 적절한 방향을 찾는 방식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 교구로 좁혀 생각하자면, 2천년 특별 사목교서에서 제시한 방향 및 정책을 두고, 먼저 그것을 그 동안 어떻게 실천해 왔는지를 돌아보고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찾아야 하겠습니다.
1. 지난 10년을 돌아보며
가. 새 교구청
새 교구청 신축사업이 이 기간 동안에 이루어져서, 그 동안 공간적 제약 때문에 미루어두었던 여러 가지 교구의 일들을 원활하게 추진할 수 있게 된 것은 참으로 뜻 깊은 일입니다.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교구민 전체의 힘으로 이루어진 이 큰 일은 우리 교구의 역사에서 길이 남을 것입니다. 우리 교구민에게 마음의 고향과 같은 치명자산 자락에 널찍한 터를 잡고 세워진 새 교구청은 단순히 교구 행정의 중심으로뿐만 아니라, 우리가 이 일을 추진하면서 지녔던 꿈처럼, 우리 교구 영성의 샘으로서 세월이 갈수록 그 모습이 뚜렷해 질 것입니다. 이렇게 마련된 새 교구청을 중심으로 우리는 이제 주님께서 맡겨 주신 사명을 더 활발하게 수행할 수 있게 된 것을 모든 교구민과 함께 기뻐하며 감사드립니다.
나. 성서 사도직
먼저, "하느님의 말씀은 교회에게는 버팀과 활력이 되고, 교회의 자녀들에게는 신앙의 힘, 영혼의 양식 그리고 영성생활의 순수하고도 영구적인 원천이 되는 힘과 능력이 있다"(계시 헌장, 21항)고 선언하고, "성서를 모르는 것은 그리스도를 모르는 것이다"라고 단언하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가르침에 따라, 우리가 그 동안에 기울여 온 노력은 어떤 결실을 맺었는가?
그 동안 사목자들과 신앙인들의 꾸준한 노력으로, 이 분야에서 이룬 변화는 참으로 놀랄만 한 것이었습니다. 몸은 지치고 마음은 각종 걱정과 근심에 짓눌려 절망 상태에서 오랜 세월을 살던 이들이 그 어두움의 터널을 뚫고 하느님 말씀에서 새로운 빛과 힘을 얻었습니다. 겉으로는 별 문제 없는 듯하지만, 실상 내면에서는 삶의 방향과 의미를 잃고 그럭저럭 살아가던 이들이, 하느님 말씀 안에서 분명한 방향과 빛을 찾아내어 새 삶을 얻었습니다. 저 자신을 포함해서 많은 사목자들은 하느님의 말씀이 사람들 속에서 이루어내는 이 놀라운 변화를 보며,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더 날카로운"(히브 4,12) 그 능력을 새삼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맡겨 주신 영혼들을 어떻게 돌보아야 할지, 그들에게 무엇이 참으로 필요한지를 알게 되어, 사목자로서의 소명과 감각을 다시 찾아내고 큰 보람과 기쁨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런 바탕 위에, 바오로 해를 지내면서 그 동안 성서에 기울여 온 정성과 열정을 더욱 키우고 확장하였습니다. 그리고 2009년 6월 29일 바오로 해 폐막 미사는 그 모든 일을 하느님께 봉헌하고 우리가 함께 노력해온 그 동안의 과정을 일단 정리하여, 우리가 어디에 와 있는지를 보고 확인하는 자리였습니다. 그 날 함께 봉헌한 미사의 말씀과 성찬을 통해서 우리는 부활하신 주님께서 말씀과 빵의 모습으로 우리와 함께 계심을 생생히 체험할 수 있었고, 그런 의미에서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에게 일어난 일이 우리에게 그대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동시에 이 분야에서 우리가 노력해야 할 방향이 어디인지도 분명히 알게 되었습니다.
더욱이 본 주교로서는 2008년 10월 로마에서 하느님 말씀을 주제로 열렸던 세계주교대의원회의에 참석하여,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계시헌장 반포 이후 성서 관련 최대 사건이었던 이 기회에 또 한 번의 큰 자극과 은총을 받았습니다. 지난 공의회 이후 전 세계에서 들불처럼 번지고 있는 하느님 말씀에 대한 열기와 사랑에 관해 현지 주교님들에게서 직접 들으며, 앞으로 해야 할 일들에 관해서도 새로운 빛을 얻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회의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오늘 여기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전하기 위해서 성서에 바탕을 둔 사제들의 강론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주교님들이 특별히 강조하셨습니다.
다. 전례의 활성화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전례는 교회의 활동이 지향하는 정점이며 동시에 거기에서 교회의 모든 힘이 흘러나오는 원천"(전례헌장 10항)이라고 선언하고, 따라서 하느님 백성의 "완전하고 능동적인 참여를 위하여 최대한의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전례헌장 14항)고 가르칩니다.
그래서 성서 봉독자, 성가대, 미사해설자, 복사, 회중 등 미사를 함께 봉헌하기 위해서 각자가 맡은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전례 연수회도 그 중의 하나였습니다. 그 결과 전례 안에서 이루어지는 성서 봉독이 크게 개선되었습니다. 먼저 적절한 사람을 선정하여 굳은 믿음을 가지고 천천히 또박 또박 소리 높여 선포하게 함으로써, 생명 없는 글자가 성령을 통해 살아있는 하느님의 말씀으로 변화되는 것을 모두가 느낄 수 있게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미사해설자가 필요할 때 최소로만 개입함으로써 전례가 자연스럽게 흘러갈 수 있게 하고, 목소리도 약간 높여 전례 전체의 분위기를 기쁨에 찬 것이 되게 하는 일에도 큰 진전이 있었습니다. 성가대도 전례헌장의 정신에 따라 노래를 통해 드리는 회중의 기도를 활기차고 생생하게 만드는 일에 큰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미사의 분위기가 부활하신 주님을 기리고 맞이하는 생명의 잔치로 많이 바꾸어지고 있습니다.
또 사제들의 강론도 공의회의 가르침에 따라 성서의 흐름을 따라 가며 그날 봉독한 대목에 충실한 말씀으로 크게 변화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사제들은 이른 바 정치, 경제, 사회 등 빵 혹은 물질을 둘러싸고 있는 문제들이 아무리 심각하고 급박해 보여도, 그 방향으로 온 관심을 몰아가려는 사탄의 유혹에 대항하여, "사람이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마태 4,4)는 성서 말씀으로 그것을 이겨내신 주님의 모범을 따라, 사람들의 깊은 갈증에 응답하기 위해 더욱 분명한 노력을 기울이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것을 구하여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마태 6,33) 하시는 말씀대로, 사람들의 제일 큰 관심사들을 두고 중요성의 순서를 혼동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하면 초대교회 공동체처럼, 현세적이고 물질적인 생활에까지 그 결과가 자연스럽게 따르게 된다는 점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라. 선교운동
우리 신앙생활의 중심이며 대표적 표현이기도 한 미사가 참으로 부활하신 주님을 기리고 그 생명이 우리 안에서 살아 움직이게 하는 모습으로 봉헌된다면, 한 번 성당에 발을 들여 놓은 사람이면, 그 매력에 빠질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우리는 확신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을 신앙에 초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일은 이미 시작되었고 여러 곳에서 큰 결실을 내고 있습니다. 이제는 단순히 믿지 않는 분들을 초대하는 정도에서 그치지 않고, 그분들에게 새로운 신앙의 세계에 눈을 뜨도록 돕는 일, 전통적인 표현을 따르자면, 예비신자 교리도 교우들 자신이 하게 되었습니다. 이를 위해 우리 교구가 공식적으로 채택한 예비자 교리서가 <함께하는 여정>입니다. 이 교재의 특성이자 장점은 내용보다 그 방법에 있습니다. 예비자 모집 때부터 전과는 전혀 다를 수 있습니다. 앞으로 예비자들이 그 과정을 끝낼 때까지 "함께 해 줄" 기성 신앙인 자신이 예비자들을 모집해 오는 것입니다. 그런 다음 최소 3명이나 4-5명이 한 반이 되면, 그 동반자가 그들과 함께 앉아서 교재에 나와 있는 순서대로 진행해 나가는 것입니다. 여기서는 가르치는 사람이 따로 있고 배우는 사람이 또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그저 교재의 순서를 따라 가기만 하면, 배워야 할 내용을 습득하게 되고, 무엇보다도 예비자 자신이 첫 시간부터 입을 열어 기도도 하고, 그날의 주제에 따라 자기의 생각을 발표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성서 대목을 함께 읽고 묵상하며 나누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이 교재의 정신과 방법을 제대로 따르기만 하면, 예비 신자는 사람에게서뿐 아니라 성령에게서도 적절한 인도를 받아 참된 신앙인으로 성장해 갈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하느님의 자녀로 되어 가는 과정을 함께 걸어온 동료들과 그들을 도와 같은 여정을 밟아 온 기성 신자가 다 같이 따뜻한 유대로 묶여져 참된 형제자매가 됩니다. 이 유대는 앞으로도 계속 그들을 묶어 서로에게 격려와 도움을 주게 됩니다. 이 일에는 최소한의 교육을 받으면 누구나 참여할 수 있지만, 특히 교구 교리신학원에서 정규 교육을 받은 이들은 여기에서 더욱 확실하고 효과적인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교회 곧 우리 신앙인이 이 세상에 살고 있는 것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을 사람들에게 전하여, 그들이 참으로 기쁘고 충만한 삶을 살 수 있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선교가 교회의 본질적 사명이라고 천명하였습니다.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이미 교회가 아니라는 말과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의 형편은 어떻습니까? 최근에 사목방문차 들렀던 한 본당의 예를 들어봅니다. 그 본당 관내에 개신교 110, 불교 12, 원불교 8, 기타 다른 종교 2 군데가 있었습니다. 모두 합치면 성당과 같은 역할을 하는 데가 125 곳이었다는 말이 됩니다. 보통 교구 하나에 해당하는 규모입니다. 거기에 우리 성당은 딱 한 군데만 있는 것입니다. 그 곳의 천주교 신자 비율은 5.6%여서 전국 평균의 약 반에 불과하였습니다. 도시 지역의 몇 본당을 제외하면 다른 본당들도 사정은 비슷합니다. 이런 통계를 보면 새삼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얼마나 많은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이제 그 동안 말씀과 전례로 무장한 우리가 새로운 각오로 이 선교 대열에 뛰어들면 우리는 놀라운 결실을 거둘 수 있을 것입니다. 특히 하느님 말씀으로 무장하고, 성령 체험으로 불타오르게 된 정예부대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양성하여 복음의 사도로 활동하게 해야 하겠습니다.
마. 사회생활
이렇게 해서 교회가 참으로 하느님 말씀으로 무장하고 성령의 빛과 힘으로 충만히 채워진 공동체가 되면, 주님께서 맡겨주신 사명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습니다. 교회는 자신을 위해서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비추고 건강하게 만들기 위해서 있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만일 소금이 짠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다시 짜게 만들겠느냐? 그런 소금은 아무데도 쓸 데 없어 밖에 내버려 사람들에게 짓밟힐 따름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산 위에 있는 마을은 드러나게 마련이다. 등불을 켜서 됫박으로 덮어 두는 사람은 없다. 누구나 등경 위에 얹어 둔다. 그래야 집 안에 있는 사람들을 다 밝게 비출 수 있지 않겠느냐? 너희도 이와 같이 너희의 빛을 사람들 앞에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 (마태 5,13-16).
지난 대희년 특별사목교서에서 대사회 활동 목표 혹은 분야로 설정한 환경, 생명, 사회복지, 북한 돕기, 외국인, 장묘문화 개선 등의 과제 가운데 몇 가지 분야에서는 많은 진전이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장묘문화를 예로 들자면, 시신을 화장하여 모시는 방법이 채택되어 큰 호응을 얻고 있습니다. 치명자산에 있는 교구성직자묘지도 새로 꾸며서, 거기 모셔져 있던 분들을 화장하여 합장묘 형태로 다시 모심으로써, 그 자리를 앞으로 오랫동안 더 쓸 수 있는 여유를 마련하였습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 사회에서 장묘문화가 나아가야할 방향을 선도하는 데에도 의미 있는 역할을 하게 되었습니다. 사회복지 분야에서도 여러 곳에 새로운 시설을 설립했거나 지자체로부터 위임받아 운영하고 있고 이를 지원하기 위한 후원회원의 수도 증가하고 있습니다. 외국인에 관해서는 그 사이 가장 극적인 변화가 있어서, 우리가 다른 나라에 가지 않아도 우리 지역을 찾아오는 외국인이 급속도로 불어나고 있습니다. 이들을 돕기 위해서 교구에서 이주민 사목부를 신설하고 신부님 두 분을 전담사제로 임명하였습니다. 그리고 후원회와 의료봉사단 등 이 일을 돕기 위한 지원체제도 더 갖추어지고 있습니다. 또 주거환경이 극히 열악한 분들을 돕기 위해 <사랑 짓는 요십이>가 설립되어 여러 곳을 대폭 수리하거나 신축하였습니다. 이 밖에도 교우들이 생명, 환경 분야 등에서도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지난 10년 동안 우리가 기울여온 이 여러 가지 노력과 이루어 낸 결과를 바탕으로, 우리는 이제부터 특별히 우리의 역량을 집중시켜야 할 분야를 생각해 봅니다.
2. 앞으로의 과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우리 신앙생활에 도입한 변화 중에서도, 밖에서 볼 때에나 그 깊은 의미로 볼 때 가장 크게 드러나는 것은, 성서를 대하는 우리의 태도와 성체성사 곧 미사 전례에 나타난 변화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아주 당연한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일생동안 이루신 일이 다름 아니라 바로 이 두 가지, 아니, 한 가지 실체의 두 가지 측면으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루가복음 24장은 그것을 잘 보여줍니다. 정치-사회적 이득 혹은 현세적 구원을 기대하며 예수님을 따라나섰다가 그분이 십자가 위에서 힘없이 죽어가시는 모습을 보고 실망하여 고향으로 돌아가던 제자들에게 뜻밖에도 주님께서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몸으로 나타나십니다. 그리고 당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그들의 눈을 단계적으로 열어 주십니다. 먼저, "유다인들에게는 비위에 거슬리고 이방인들에게는 어리석게 보이는"(1고린 1,23) 당신의 십자가상 죽음을 새롭고 깊은 눈으로 보게 해 주십니다. 이를 위해 주님께서는 "모세의 율법서와 모든 예언서를 비롯하여 성서 전체에서 당신에 관한 기사를 들어 설명해 주십니다"(27절). 그 때 제자들의 마음속에 일어난 감동은 어느 시대에나 성서를 제대로 해설하고 설명하는 사제들의 강론이 청중의 마음속에 불러일으키는 반응의 표본입니다. "길에서 그분이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나 성서를 설명해 주실 때에 우리가 얼마나 뜨거운 감동을 느꼈던가!"(32절).
성서의 깊은 뜻을 해설해 주심으로써 제자들의 마음속에 그처럼 뜨거운 감동을 일으키신 뒤에, 주님께서는 두 번째 단계로, "함께 식탁에 앉아 빵을 들어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나누어 주셨습니다"(30절). 이 때 제자들에게 일어난 일을 성서는 이렇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제서야 그들은 눈이 열려 예수를 알아보았다"(31절). 태어나면서부터 눈이 멀었다가 그리스도를 만나 눈이 뜨인 사람(요한 9,1-7), 그리스도인을 붙들러 나섰다가 도리어 그리스도에게 "붙들려"(필립 3,12 참조) 성령을 받고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떨어지면서 다시 보게 된"(사도 9,18) 바오로도 같은 체험을 하였습니다.
3.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
이 이야기는 언제 어디서나 그리스도교 신앙생활의 표본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도 이 구조와 순서를 그대로 따라서 "그리스도교 생활 전체의 원천이며 정점"(제2차 바티칸 공의회, 교회에 관한 교의헌장 11항)이요 "교회 신비의 핵심"(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회칙, 교회는 신비로 산다, 1항)인 성체성사 곧 미사를 드리고 있습니다. 미사에서 신앙인들은 먼저 성서 말씀을 듣고 사제의 강론을 통해서 그 깊은 뜻을 깨달아 성령의 힘으로 마음속에 감동을 받습니다. 그런 다음, 성찬례를 통해 그리스도의 몸으로 변화된 빵을 나누어 먹음으로써 부활하신 주님을 깊이 받아 모시고 그분과 하나가 됩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말씀과 빵의 모습으로 오시는 주님을 받아먹고 주님의 힘으로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필생의 과업이자 꿈으로 간직하고 그렇게 될 날을 향해 당신의 온 삶을 바쳐 준비하고 걸어가셨던 이상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당신 자신 안에 살아 움직이며 "성령 받은 이"라는 뜻의 그리스도 곧 메시아로서의 사명을 다할 수 있게 해 주는 그 힘, "위에서 오는 능력"(루가 24,49)을 제자들에게 그대로 전해주심으로써, 그들도 역시 "성령 받은 이" 곧 그리스도인이 되게 해주는 것을 당신 삶 전체의 마지막 목표로 삼으셨던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사람이 살아가는 힘은 밥에서만 얻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이라는 또 다른 밥이야말로 사람으로서 진정한 행복과 자유를 누리며 살 수 있게 해 주시는 힘의 원천이라는 사실을 온 몸으로 체험하게 해 주실 것이었습니다. "정말 잘 들어 두어라. 만일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지 않으면 너희 안에 생명을 간직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누릴 것이며 내가 마지막 날에 그를 살릴 것이다. 내 살은 참된 양식이며 내 피는 참된 음료이기 때문이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서 살고 나도 그 안에서 산다.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고 내가 아버지의 힘으로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의 힘으로 살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늘에서 내려 온 빵이다. 이 빵은 너희의 조상들이 먹고도 결국 죽어 간 그런 빵이 아니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이다."(요한 6,53-58)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힘으로 사시듯이, 우리도 그분을 먹으면 예수님의 힘으로 살게 됩니다. 예나 이제나 이 표현은 너무나 투박하고 거칠어서 "이 말씀은 듣기가 너무 거북하다. 누가 듣고 있을 수 있겠는가?"(새 번역 성경) 하며 깜짝 놀랄 수밖에 없는 면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그런 반응에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말씀하십니다. "내 말이 귀에 거슬리느냐? 사람의 아들이 전에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보게 되면 어떻게 하겠느냐? 육적인 것은 아무 쓸모가 없지만 영적인 것은 생명을 준다.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영적인 것이며 생명이다."(요한 6,61-63) 당신 자신 아버지 하느님의 힘으로 사시는 것과 같이 제자들도 당신의 힘으로 살게 하기 위해서는 아무리 큰 오해와 반발이 있어도 결코 물러설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한 삶을 온전히 바치신 그분의 사명은 바로 이 한 점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위에서부터 오는 힘", 능력은 본래 성령을 가리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는 에프렘 성인의 말씀을 인용하여 "성령의 힘으로" 그리스도의 몸이 된 이 빵을 받아먹음은 바로 그 성령을 먹는 것이라고 가르쳐 주십니다.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받아 모시는 영성체로써 그리스도께서는 또한 우리에게 당신 성령을 보내 주십니다." 에프렘 성인은 이렇게도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빵을 당신의 살아 있는 몸이라 부르셨고, 그 빵을 당신 자신과 당신 성령으로 가득 차게 하셨습니다. … 믿음으로 그 빵을 먹는 사람은 불과 성령을 먹는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 이 빵을 받아먹으십시오. 그 빵으로 성령을 먹으십시오. 이것은 진실로 내 몸이며, 내 몸을 먹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기 때문입니다"(에프렘, 성주간 강론에서).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기억하기 위해서 한 가지만은 꼭 하라고 당부하셨는데, 그것이 다름 아니라 제자들이 당신을 먹는 일이었습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전해 준 것은 주님께로부터 받은 것입니다.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날 밤에 빵을 손에 드시고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시고 '이것은 너희들을 위하여 주는 내 몸이니 나를 기억하여 이 예를 행하여라.'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식후에 잔을 드시고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다음 '이것은 내 피로 맺는 새로운 계약의 잔이니 마실 때마다 나를 기억하여 이 예를 행하여라.'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이 빵을 먹고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님의 죽으심을 선포하고, 이것을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하십시오."(1고린 11,23-26)
미사. 성체성사. 주님의 몸과 피를 먹고 마심. 어떤 말, 어떤 표현을 쓰든지 뜻은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을 놓치지 않으려면, 그분의 힘으로 살려면, 우리가 무엇보다 먼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이것입니다. 거기서 말씀과 빵의 모양으로 우리에게 오시는 주님을 먹고 내 생명 깊숙이 받아 모셔야만 나는 비로소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 이것이 빠지면 아무리 좋은 일을 한다 해도 그것은 인간적인 일, 하느님 보시기에는 헛수고일 뿐입니다. 이것이 들어가면, 아무리 사소한 행위라 해도 영원의 의미를 띠게 됩니다. 영원하신 분께서 하신 일에 끼어들어 하나가 되기 때문입니다.
4. <세계 위에서 드리는 미사>의 저자이신 떼이야르 샤르댕 신부님의 말씀에 따르면, 인간의 삶은 적극적으로 무슨 일을 하는 것(行爲)과 수동적으로 당하는 것(受苦)으로 이루어집니다. 밭에 나가 농사를 짓든, 부엌에서 음식을 준비하든, 사무실에서 사무를 보든, 연구실에서 탐구를 하든, 사람은 무엇인가를 하며 살게 마련입니다. 어떤 일, 행위를 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삶에는 각자가 흔히 자기 의지와는 상관없이 당하고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면도 있습니다. 적극적으로 하는 일과 소극적으로 당하는 일은 마치 들이쉬고 내쉬는 것으로 이루어지는 우리의 호흡처럼, 혹은 빛과 그림자처럼, 서로 떨어질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무슨 일을 하려면 반드시 수고가 따릅니다. 어떤 일을 할 때에는 몸이 피로하고, 시간이 소진되고, 다른 일을 희생시켜야 하는 등, 수고가 부산물처럼 따릅니다. 태어나고 성장하고 열매를 맺을 때가 있는가 하면, 열매는 떨어지고 노쇠하고 죽어야 하는 때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주님께서 사제의 입을 빌어 농부가 생산해 낸 빵 한 조각을 손에 드시고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다음 "이것은 내 몸이다" 하고 말씀하실 때, 그 말씀은 단순히 그 빵 조각만 그분의 몸으로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의미로는 물질세계에 살면서 적극적 행위를 통해 무엇인가를 이루어내는 인간들의 활동, 나아가 창조계 자체를 최종 목표인 창조주 하느님과의 합일을 향해 이끌어가는 우주적 움직임 전체도 그분의 몸으로 변화시키어 아버지께 드리는 제물로 만든다는 것입니다. 같은 이치로, 포도주 축성 때에는, 무슨 행위를 하든 필연적으로 따르는 수고를 포도주와 함께 예수님의 피로 변화시킨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런 사실을 믿고, 그것을 생각하면서 우리가 성체성사에 참여하면, 우리는 예수님의 몸과 피와 함께 우리의 삶 전체를 제물로 하여 하느님 아버지께 봉헌하는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 (세계 위에서 드리는 미사,<봉헌> 참조).
요한 바오로 2세는 1995년 당신의 사제서품 50주년을 맞아 "선물과 신비"라는 책을 내셨는데, 거기에서 현대의 이 대교황님은 떼이야르 신부님의 "세계 위에서 드리는 미사"가 자신의 사제직 수행에서 얼마나 큰 영향을 끼쳤는지를 밝히시며 이렇게 쓰셨습니다. "성체성사는 '떼이야르 신부님의 아름다운 표현대로, 세계 곧 땅덩어리를 제단 삼아 드림으로써 온 세상의 노동과 고통을 하느님께 제물로 바치는 것이다"(73쪽). 교황님께서는 2003년에 반포하신 회칙 <교회는 성체성사로 산다>에서도 떼이야르로부터 받은 영향을 분명히 나타내셨습니다. "성체성사를 생각할 때, 또 사제와 주교로서, 그리고 베드로의 후계자로서 지낸 삶을 되돌아 볼 때, 저는 자연스레 제가 성찬례를 거행할 수 있었던 여러 기회와 장소들을 떠올리게 됩니다. 제가 처음으로 본당 사목을 맡은 니에고비치의 성당, 크라쿠프의 성 플로리아노 대성당, 베벨 주교좌 성당, 성 베드로 대성전을 비롯한 로마와 세계 곳곳의 여러 대성전과 성당들이 기억납니다. 산길, 호숫가, 바닷가 등에 지어진 경당에서 거룩한 미사를 거행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운동장과 도시의 광장에 세운 제대에서도 미사를 거행하였습니다. 이렇게 다양한 장소에서 거행한 성찬례를 통하여 저는 성세성사의 보편적인 특성, 다시 말해 우주적인 특성을 강렬하게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참으로 우주적입니다! 성찬례는 시골 성당의 초라한 제대에서 거행될 때에도 어떤 면에서는 늘 세계 (곧 땅덩이)라는 제대에서 거행되기 때문입니다"(교회는 성체성사로 산다, 8항).
베네딕도 16세께서도 추기경 시절에 전례에 관해 쓰신 책에서 전례를 통한 예배와 창조의 관계에 관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예배의 목적과 창조계의 목적이 전체로서 하나이며 같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이 둘이 모두 신화(神化) 곧 자유와 사랑의 세계를 향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 말은 역사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이 우주 속에 나타난다는 뜻이다. 우주는 폐쇄된 구조물이거나, 정체되어 있는 그릇이 아니고, 따라서 역사는 그 안에서 우연적으로만 발생할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다. 우주는 한 점에서 시작하여 또 하나의 점인 끝을 향해 움직여가는 것이다. 그런 뜻에서 창조물 자체도 역사이다."
그리고 특히 떼이야르의 <세계 위에서 드리는 미사>를 높게 평가하시며 이 신부님의 생각을 이렇게 요약하셨습니다. "떼이야르는 계속해서 그리스도교 경신행위에 새로운 의미를 제공한다. 주님의 몸으로 변화된 제병(밀떡)은 그리스도께서 마지막 때에 당신 안에 온 만물을 받아들여 근본적으로 변화시키고 신화(神化)시키실 일을 앞두고, 그것을 어느 정도 미리 실현한다. 이런 뜻에서, 성체성사는 우주가 움직여 나아가는 데 있어서 그 방향을 부여한다. 그 움직임에 최종 목적지를 넌지시 지시해 주고, 동시에 그 쪽으로 움직여 가도록 부추긴다"(라찡어, 전례의 정신). 그리고 교황이 되신 다음 베네딕도 16세께서는 성체성사에 관한 세계 주교대의원회의 후속 교황권고 <사랑의 성사>에서 떼이야르의 같은 생각을 계속 천명하십니다. 예를 들면 이 문헌 47항에서 이렇게 선언하십니다. "우리가 제대에 바치는 빵과 포도주 안에서 구원자이신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피조물을 받아들이시어 변화시키시고 하느님께 바치십니다. … 인간의 활동은 성찬례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구원하시는 희생제와 일치를 이루게 됩니다."
이 문헌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가 몸담아 살고 있는 현실과 역사 그리고 사회 구조를 개선해 나가는 일에 있어서도 이 성찬 영성이 얼마나 큰 역할을 할 수 있는지를 가르쳐 줍니다. "성찬례 자체가 인류 역사와 우주 전체에 강렬한 빛을 비추어 줍니다. 이러한 성사적 전망에서, 우리는 교회의 모든 사건이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을 알려 주시고 우리를 일깨우시는 일종의 표징이라는 사실을 날마다 깨닫습니다. 따라서 삶의 성찬적 모습은 역사와 우주를 바라보는 우리의 사고방식에 참다운 변화를 불러일으키는 데에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전례 자체가 우리에게 이 사실을 가르쳐줍니다. 예물 준비 기도에서, 사제가 하느님께 빵과 포도주 위에 축복과 청원 기도를 바치며 '땅을 일구어 얻은 이 빵', '포도를 가꾸어 얻은 이 술' 이라고 말할 때에 그러합니다. 이 말씀으로 그 예식은 인간의 모든 노고와 활동을 하느님께 바칠 뿐만 아니라, 이 세상이 우리가 살아가는 데에 필요한 모든 것을 주도록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것임을 알게 해 줍니다"(사랑의 성사,92항).
여기서 우리는 베네딕도 16세께서 "삶의 성찬적 모습은 역사와 우주를 바라보는 우리의 사고방식에 참다운 변화를 불러일으키는 데에 도움이 될 수 있다"고 하신 말씀을 좀 더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현대 과학은 우주가 약 130여 억 년 전에 바늘 끝 같이 작은 한 점에서 시작된 대폭발에서 출발해서 긴 세월에 걸쳐 지금의 이 거대 우주가 만들어졌고 이 창조의 과정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고 가르쳐 줍니다. 오늘날 흔히 빅뱅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이 이론을 맨 처음에 주창한 사람은 교황청 과학학술원 회원이었던 러 메트르 신부였습니다. 그리고 이 이론은 현대의 많은 과학자들이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런데 현대 물리학이 발견해 낸 여러 가지 자료를 바탕으로 이런 이론을 생각해 낸 것은 러 메트르가 하느님의 창조설을 믿는 신앙인이라는 사실이 큰 역할을 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습니다. 과연 성서는 이 우주가 하느님께서 만들어내신 작품이라고 가르쳐주고, 성서의 마지막 권인 요한 묵시록은 하느님께서 우주 만물의 시작이요 끝, 그것을 만드신 분이시며 완성하실 분이라는 뜻에서 "나는 알파요 오메가다"(묵시 1,8) 하시는 그분의 말씀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우주의 시작이며 끝 곧 우주가 가고 있는 마지막 목표라면, 사람뿐 아니라 "모든 피조물은 하느님의 자녀가 나타나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다"(로마 8,19)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우리는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바오로 사도의 이어지는 말씀도 쉽게 이해가 됩니다. "곧 피조물에게도 멸망의 사슬에서 풀려나서 하느님의 자녀들이 누리는 영광스러운 자유에 참여할 날이 올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피조물이 오늘날까지 다 함께 신음하며 진통을 겪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피조물만이 아니라 성령을 하느님의 첫 선물로 받은 우리 자신도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날과 우리의 몸이 해방될 날을 고대하면서 속으로 신음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희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로마 8, 21-24).
하느님의 자녀, 곧 그분의 외아들이 이 세상에 오셔서 이 우주가 어디를 향해 가야 하는 지를 잘 보여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주 진행의 끝에 살지 않으면서도 지금부터 이미 그 끝을 알고 거기를 향해 달려갈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우주가 아주 단순한 구조에서 출발하여 단순한 것들이 <서로 하나가 되는 과정>을 거쳐 이렇게 복잡하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진화해 왔다고 과학은 가르쳐줍니다. 이렇게 우주는 점점 더 깊고 넓은 의미의 <하나가 되는 방향>으로 발전해 왔는데, 그 <하나 됨>은 다름 아닌 <사랑> 이라고 떼이야르는 말합니다. 그리고 이 우주 공간에서 가장 고급의 <사랑화>에 도달한 인간이야말로 그런 의미에서도 만물의 영장이며, 주님께서 몸소 보여주시고 인간들에게 새 계명으로 주신 사랑은 바로 이 우주 진화의 방향을 가리켜 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는 너희에게 새 계명을 주겠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세상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요한 13,34-35). 이분 곁에서 가장 사랑을 많이 받았던 요한은 예수님과 함께 했던 삶을 돌아보며 크게 깨달은 것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해서 당신의 목숨을 내놓으셨습니다. 이것으로 우리가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형제들을 위해서 우리의 목숨을 내놓아야 합니다"(1요한 3,16). 이 "예수의 사랑을 받던 제자"(요한 13,23; 21,7; 21,20)는 이렇게 단언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 안에 있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있으며 하느님께서는 그 사람 안에 계십니다"(1요한 4,16).
5. 벗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고 말씀하시고, 십자가 죽음을 통해 보여주신 바로 그런 사랑을 기억하고 우리 온 존재 안에 받아들이기 위해서 우리는 오늘도 미사를 봉헌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미사는 성당 밖에서 드리는 부분과 성당 안에서 드리는 부분, 이렇게 두 부분으로 나눠집니다. 성당 밖에서 드리는 부분은 성당 안에서 드리는 부분을 중심으로 그 전과 후로 또 나눌 수 있는데, 그 전에는 미사 때 드릴 봉헌물을 준비하는 시간이고, 그 후는 미사의 열매를 사방에 나가 씨앗처럼 뿌리고 실천하는 시간입니다. 성당 안에서 드리는 부분에서도 "이것은 내 몸이다." "이것은 내 피다." 하는 사제의 말로 빵과 포도주를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화시키는 부분은 핵심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런데 앞에서 본 바와 같이, 우리 신앙인의 입장에서 보자면, 이 때 주님의 몸으로 변화되는 것은 제단 위에 올려진 빵과 포도주에만 국한되지 않고, 노동과 수고로 이루어지는 우리의 삶 전체도 그 변화 영역에 포함되기 때문에, < 예물 준비 기도>가 특별한 의미를 지니게 됩니다. 그 때에 사제와 함께 온 회중은 이런 기도를 바칩니다. 먼저 사제가 이렇게 기도합니다. "온 누리의 주 하느님, 찬미 받으소서. 주님의 너그러우신 은혜로 저희가 땅을 일구어 얻은 이 빵을 주님께 바치오니, 생명의 양식이 되게 하소서." 그러면 회중은 "하느님 찬미 받으소서." 하고 응답함으로써, 사제가 방금 바친 기도에 마음으로부터의 동의를 표현하며, 자신의 노동과 수고를 빵과 포도주에 섞어 하느님께 제물로 드리는 것입니다.
이 기도의 깊은 의미를 새겨봅시다.
여기서 사제는 빵을 손에 받쳐 들고 하느님을 온 누리, 우주 만물의 주인으로, 창조자로 고백하며 그분께 찬미를 드립니다. 지금 사제의 손에 들려 있는 빵은 창조주 하느님을 믿는 신앙인의 눈으로 볼 때 대단히 깊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선 온 우주가 동원되어 만들어낸 산물입니다. 아주 간단한 것들만 우선 생각해도 그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태양은 빛을 주고, 대기는 바다에 있던 수분을 실어다 비로 뿌려주었으며, 바람은 수분작용을 도와주었고, 공기는 숨을 쉬게 해 주었으며, 흙은 영양분을 제공했습니다. 조금 더 깊이 생각하면, 이 지구가 태양에서 조금만 멀리 떨어졌거나 조금만 가까웠어도 생명이 여기서 나타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또 달이 조금만 더 컸거나 작았어도 바다의 조수 간만의 차이를 적절히 만들어내지 못해서 생물이 살아가기가 힘들었을 것입니다. 이런 방향으로 생각을 계속 뻗치면, 여기 빵 한 덩어리가 제단에 올려지기 위해서는 수 만 가지 조건이 아슬아슬하게 맞아떨어져서 밀이 자랄 수 있었던 것을 깨닫게 되며, 따라서 무심히 지나칠 수 있는 빵 한 덩어리, 그것을 내기 위해서 땅에서 자란 밀 한 포기가 거의 무한한 공간 속에서 그야말로 우주적 기적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더구나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을만큼 고급 정신을 가지고 태어난 인간이 스스로를 보며 느끼는 신비감은 더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그러니 빵을 받쳐 들고 온 누리의 하느님께 먼저 감사와 찬미를 드리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주님의 너그러우신 은혜"가 있었기에 거기 빵이 제단에 올려지게 되었고,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 삶을 누릴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주, 대자연이 혼자서 빵을 만들어내지는 않았습니다. 우리 인간의 몫도 거기 끼어들어 빵을 만들었습니다. "땅을 일군" 것은 "저희"인 것입니다. 우주를 섭리하신 하느님과 우리의 합동작업이 이루어 낸 산물이 지금 빵으로 제단에 올려져 그리스도의 몸으로 변화되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앞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여기서 빵은 우리가 하루 종일 하는 모든 노동, 적극적인 행위 전체를 대표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밭에서 일하는 농부뿐 아니라, 사무실, 상점, 교실, 연구실, 관청 등, 일터가 어디이든지 간에, 우리의 모든 활동이 이 빵 안에 수렴되어 <예물 준비 기도> 때에 제단 위에 올려지는 것입니다.
이어서, 사제는 포도주 잔을 들고 기도합니다. "온 누리의 주 하느님, 찬미 받으소서. 주님의 너그러우신 은혜로 저희가 포도를 가꾸어 얻은 이 술을 주님께 바치오니, 구원의 음료가 되게 하소서." 그리고 회중은 조금 전과 같이 "주 하느님, 길이 찬미 받으소서." 하고 응답합니다. 여기서도 역시, 기본 뜻은 같습니다. 다만, 주님의 피로 변화될 포도주를 들고서는 적극적 행위나 노력 대신, 소극적 당함이나 수고를 제물 삼아 그리스도의 피와 함께 하느님께 봉헌하는 것입니다.
6. 교회 안에서 성찬례가 이처럼 결정적으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면 교회 구성원 전체가 여기에 얼마나 큰 정성과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인지는 두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특히 바로 이 성찬례에 그 이름과 실체의 뿌리를 두고 있다고 할 수 있는 <사제>들에게 그것이 얼마나 목숨처럼 중요한 것인지는 자명한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성찬례가 교회 생활의 중심이며 정점이라면, 그것은 또한 사제 직무의 중심이며 정점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충만한 감사의 마음으로, 저는 성찬례가 '성체성사 제정 때에 유효하게 생겨난 성품성사의 근본적이고 핵심적인 존재 이유'라고 되풀이하여 말합니다. 사제들은 광범위하고 다양한 사목 활동에 참여합니다. 현대 세계의 사회 문화적 상황들을 고려할 때, 우리는 사제들이 그처럼 많고 다양한 임무 속에서 중심을 잃어버릴 지극히 현실적인 위험에 직면해 있다는 것을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목자다운 사랑에서, 사제의 생활과 활동을 통합시켜 주는 끈을 보았습니다. 이 목자다운 사랑은 '주로 성찬의 희생 제사에서 흘러나오며, 따라서 성찬례는 모든 사제 생활의 중심이며 근원'(사제생활교령, 14항) 이라고 공의회는 덧붙입니다."
그렇습니다. 여기 인용한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의 말씀 가운데에서도 마지막 부분은 오늘날 우리 사제들의 고충과 빠져들 수 있는 위험을 날카롭게 지적해 줍니다. 과연 우리는 정치, 경제, 사회 상황의 복잡한 환경과 변화에 따라, 일의 중요성과 우선순위에 대한 감각을 잃고 문제의 바다에 빠져 표류할 수가 있습니다. "그처럼 많고 다양한 임무 속에서 중심을 잃어버릴 지극히 현실적인 위험에 직면해 있는" 것입니다. 이 위험에 빠지지 않고 주어진 사명을 제대로 실천하는 길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표현한 대로 목자다운 사랑입니다. 그리고 이 목자다운 사랑은 "주로 성찬의 희생 제사에서 흘러나오며, 따라서 성찬례는 모든 사제 생활의 중심이며 근원'(사제생활교령, 14항)" 이라고 공의회는 덧붙입니다.
7. 구체적 제안
이 모든 점을 생각하며, 우리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채택하고, 우리 교구가 2000년 특별 사목교서에서 밝힌 바 있으며, 지금까지의 숙고에서 생각해 온 것을 다음과 같이 요약하여 제시합니다.
가. 하느님 말씀
그 동안 성서 읽기, 쓰기, 외우기, 공부하기, 나누기 등 온갖 방법을 다해 하느님 말씀에 대한 우리의 정성을 다했습니다. 우리 교구가 공식 방법으로 채택한 <성서백주간> 등 많은 방법들이 읽기, 공부, 묵상, 기도, 나눔 등의 요소들을 잘 갖추고 있어서 하느님 말씀을 삶에 깊이 받아들이고 그 힘으로 생활에 큰 활력과 변화를 경험하는 이들이 대단히 많습니다. 그런데 성서 공부를 정식으로 시작하지 못한 이들이 아직도 상당히 있습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읽기, 쓰기, 외우기, 공부하기까지는 잘하고 있지만, 다른 이들과 함께 나누기까지는 아직 가지 못한 이들도 많습니다. 그런데 성서 공부와 묵상은 다른 이들과 함께 나누는 데에까지 가야만 성령의 불길이 활활 타오르고 그 효과가 제대로 나타납니다. "내가 다시 말한다. 너희 중의 두 사람이 이 세상에서 마음을 모아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무슨 일이든 다 들어 주실 것이다. 단 두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마태 18,19-20). 이 말씀은 특히 하느님 말씀을 함께 묵상하는 자리에 잘 어울리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하느님 말씀을 대하는 자세에서 우리 모든 믿는 이들의 모범이신 성모 마리아의 모습을 가슴에 모시고 그분의 뒤를 따라야 하겠습니다.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 속 깊이 새겨 오래 간직하였다"(루가 2,19). 사람들이 사는 동네에서는 방을 찾을 수가 없어, 짐승 우리에서 첫 아들을 낳아 짐승의 밥 그릇에 아기를 뉘어놓았을 때 일어난 모든 일들을 대하는 그분의 자세를 성서는 이렇게 전해 주고 있습니다. 귀로 듣는 말씀으로, 눈으로 읽은 글로, 혹은 삶에 일어나는 크고 작은 사건으로 우리에게 전해지는 하느님의 말씀을 대하는 마리아의 태도를 성서는 간단하면서 뜻 깊은 말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마리아께서 구세주의 어머니가 되신 것은 예수님을 몸으로 낳아주셨기 때문이라기보다 말이나 사건으로 건네지는 하느님의 말씀을 온 몸에 받아들여 거기에서 그것이 자라나 열매를 맺을 수 있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에서 우리는 그 점을 분명히 알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고 계실 때 군중 속에서 어떤 여자가 목소리를 높여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하고 예수님께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루가 11,27-28)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이렇게 비유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이 땅에 씨를 뿌려 놓았다. 하루 하루 자고 일어나고 하는 사이에 씨앗은 싹이 트고 자라나지만 그 사람은 그것이 어떻게 자라는지 모른다. 땅이 저절로 열매를 맺게 하는 것인데 처음에는 싹이 돋고 그 다음에는 이삭이 패고 마침내 이삭에 알찬 낟알이 맺힌다. 곡식이 익으면 그 사람은 추수 때가 된 줄을 알고 곧 낫을 댄다"(마르 4,26-29).
식물은 땅에 씨를 뿌리고 사람을 비롯한 동물은 몸에 씨를 뿌립니다. 씨를 뿌린 다음에는 새들이 와서 쪼아 먹지 못하게 지켜주고, 땡볕에 타죽지 않도록 흙이나 가림막으로 덮어주며 잡초에 숨막히지 않게 김을 매 줍니다. 그렇게 해서 잘 지켜주기만 하면 씨앗은 싹이 터서 자라나 열매를 거두는 데까지 땅의 힘만 빌어 스스로 성장합니다. 사람을 비롯한 동물의 씨가 자라는 과정도 마찬가지입니다. 여인이 사람의 씨앗을 받은 다음에는 그것이 손상되지 않게 몸 조심을 하고 영양분을 고루 섭취하며 잘 지켜주기만 하면, 뱃속에서 아기는 무럭무럭 자라나 마침내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여인이 아기를 임신하여 여러 달 동안 잘 지켜서 마침내 세상에 태어난 다음에는 젖을 먹여 기른 경험을 바탕으로 예수님을 낳아주신 어머니를 부러워하는 말을 듣고, 정말로 부러워할 사람이나 이유가 어디에 있는지를 분명히 가르쳐 주십니다. 사람의 씨앗을 받아 오랫동안 뱃속에 간직했다가 아기가 세상에 태어난 다음에는 젖을 먹였다는 의미에서 당신의 어머님이 행복하다기보다는, 당신의 어머니를 포함하여 이 세상의 누구라도, 당신의 말씀이라는 씨앗을 받아들여 오랫동안 잘 지켜주면, 다시 말해서 그 씨가 잘 자랄 수 있도록 보호해 주면, 그 씨앗이 자라서 열매를 맺을 것이고, 그런 사람이야말로 행복하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마리아께서 행복한 분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라는 의미가 넌지시 드러나는 말씀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2008년 세계 주교 대의원회의에서도 확인한 바와 같이, 마리아는 당신의 마음을 하느님 말씀의 도서관으로 만드셨을 뿐 아니라, 무엇보다도, 하느님 말씀이라는 씨앗이 뿌리를 내려 잘 자랄 수 있는 비옥한 토양으로 만드셨던 것입니다. 우리도 모두 같은 의미에서 자신의 온 존재를 하느님 말씀을 받아 잘 자라게 하는 좋은 토양으로 만들어야 하겠습니다.
나. 전례
전례헌장의 가르침대로, 모여온 하느님 백성이 하나도 구경꾼으로 머물지 않고 모두가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함께 이루는 전례가 되게 하기 위해서, 앞으로도 본당별로, 공동체 별로 많은 창의력과 상상력을 발휘하여, 미사 분위기를 한층 더 활발하고 생기 넘치는 것이 되게 합시다. 그렇게 하자면, 성서 봉독자, 성가대 책임자, 미사 해설자 등 전례 안에서 특별한 책임을 맡은 이들이 필요한 교육을 받아야 합니다.
다. 이 두 분야에서 이룬 성과
특히 대희년 이후 오늘날까지 말씀과 전례를 위해 온갖 정성을 쏟아 오신 사목자들의 노력으로, 우리 교구의 많은 본당들이 하느님 말씀에 대한 새로운 열정을 바탕으로 전례가 대단히 활성화하고 신자들의 생활에 큰 변화가 도입된 것은 참으로 기쁜 일입니다. 우리는 그 동안의 경험을 바탕으로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가 한층 더 기도하고 성령의 빛 속에서 함께 찾아감으로써, 하느님 말씀이 더욱 더 모든 신앙인들의 삶 속 깊숙이 침투해 빛을 주고, 성찬례를 통해서 부활하신 주님의 힘이 그 안에서 한결 더 활발하게 움직일 수 있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라. 사회생활
이렇게 해서 얻은 힘이 신앙인들을 통해서 이웃과 주변 사회에서 꽃피고 열매를 맺게 되어야 하겠습니다. 특히, 환경, 생명, 사회복지, 국내 외국인에 대한 형제적 배려 등 지금까지 추진해 왔던 일들을 한 결 더한 열정으로 계속해 나가야 하겠습니다.
마. 선교
그렇게 해서 우리의 모든 역량을 교회의 본질적 사명인 선교에 기울여야 하겠습니다.
8. 맺으며
<아버지>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죽었다가 부활하시어 지금은 특히 말씀과 빵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살아 계십니다. 그리고 살아계신 주님께서 이 말씀과 빵 속으로 들어오시어 거기 계시게 해 주시는 분은 <생명을 주는 힘이신 성령>이십니다. 약속하신 성령을 받았을 때, 제자들은 그것을 깨달았습니다. "그 날이 오면 너희는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과 너희가 내 안에 있고 내가 너희 안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요한 14,20). 성령이 오실 날을 약속하시면서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 예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우리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아 이미 <그날> 속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거기에 견진성사까지 받으면 우리는 세례를 완성하여 우리 안에서 성령의 불길이 활발하게 타오르게 됩니다.
이 일이 언제 어디에서나 계속되게 하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세워주시며 "나를 기억하기 위하여 이 예를 행하라"고 당부하신 것이 성체성사 곧 미사입니다. 이 미사를 구성하는 말씀과 성찬에 온 정성을 기울이면 우리는 성령의 빛과 힘을 가득히 받을 것입니다. 그리고 미사는 우리 각자가 사는 세상에서 드리는 부분과 성당에서 드리는 부분으로 이루어집니다. 세상에서 드리는 부분은 우리가 직장에서, 가정에서, 그 밖에 다른 일터에서 하는 모든 노동과 그 과정에서 겪는 수고로 이루어지고, 그것이 성당에서 드리는 미사 때에 빵과 포도주에 합해져서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화되어 하느님 아버지께 봉헌됩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가 세상에 살면서도 "이 세상에 속한 사람들이 아니게"(요한 17,16) 되면, 우리는 이제 세상에 나가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제, 수도자, 교우 등 하느님 백성 전체는 무엇보다 먼저 말씀과 성찬으로 이루어지는 성체성사를 삶의 중심에 놓고, 성당에서 드리는 미사를 제대로 봉헌하는 일에 모든 힘을 집중해야 하겠습니다. 거기서 빛과 힘을 가득히 받은 다음, 성당 밖, 우리가 사는 세상에 나가 주님의 도우심과 각자가 할 수 있는 노력을 다해 복음을 전하며, 세상을 밝고 건강하게 만드는 일에 몸을 바쳐야 하겠습니다.
2009년 대림 제 첫 주일에
천주교 전주교구장 이 병 호(빈첸시오) 주교
천주교 전주교구장 이 병 호(빈첸시오) 주교
교구사목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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