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대
2015년도 사목교서 - 너희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
본문
교형자매 여러분!
1
복음의 기쁨
“복음의 기쁨은 예수님을 만나는 모든 이의 마음과 삶을 가득히 채워 줍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죄와 슬픔, 공허감과 외로움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기쁨이 끊임없이 새롭게 솟아납니다”(복음의 기쁨, 1). 그렇기 때문에,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지닌 기쁨을 상대방과 함께 나누기를 원하고, 참된 아름다움의 세계를 가리켜주며, 그들을 풍성한 잔치에 초대하는 사람다운 모습이어야 합니다”(복음의 기쁨, 14항).
우리는 2014년 8월 프란치스코 교황의 한국 사목방문 기간, 그분의 작은 몸짓과 말씀 하나하나를 통해서, 위의 말씀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복음선포자의 참된 모습을 눈으로 확인하였습니다. 그분의 그런 모습은 많은 국민을 감동시켰고, 사람들의 마음속 깊이 잠들어 있던 무한한 선과 진리, 그리고 아름다움에 대한 향수를 흔들어 깨웠습니다. 그래서 ‘기쁜 소식’이 무엇이며, 그것을 어떻게 선포해야 하는지를 새롭게 깨달았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사도로서 내놓은 권고서 [복음의 기쁨]은 바로 이 복음화를 구체적으로 어떻게 실현할 것인지를 밝히는 대헌장입니다. 따라서 세례를 받은 우리 모두는 하나도 빠짐없이 그리스도인-제자-복음선포자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분명하게 일깨워주시는 교황님의 가르침대로, 이제부터 우리가 개인, 가정공동체, 크고 작은 교회 단체, 소공동체, 본당 공동체로서, ‘복음의 기쁨’을 깊이 공부하고, 거기에 제시되어 있는 정신과 방법에 따라 복음선포의 주역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렇게 해서 ‘밖을 향해 힘차게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복음의 기쁨]은 모두 5개의 장으로 되어 있는데, 그것은 복음선포에 나선 사람으로서 명심해야 할 일들을 차례로 제시한 것입니다. 먼저, 복음 선포자로서 갖추어야 할 제일 중요한 자격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그분께서만 주실 수 있는 기쁨을 체험하는 일입니다(1장). 그런데 세상은 복음과는 정 반대 방향의 흐름에 휘말려 있기 때문에, 이 일에는 흔히 대단히 심각한 저항과 어려움, 혹은 유혹이 따르게 마련입니다(2장). 그러므로 복음 선포에는 특별한 방법이 필요합니다(3장). 그리고 복음은 내적 평화라는 사적 영역에만 머물 수는 없고,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어야 하기 때문에, 사회·정치적 차원을 지니게 됩니다(4장). 따라서 ‘이렇게 엄청난 일을 우리가 어떻게 해 낼 수가 있을까?’ 하는 의문이 일어날 수 밖에 없습니다. 이 의문에 대한 대답은 “위에서 오는 능력”(루가 24,49) 곧 성령입니다(5장).
앞으로전 세계 모든 지역 공동체와 함께, 프란치스코 교황의 사목 대헌장 [복음의 기쁨]을 우리 교구의 사목 지침서로 정하고, 각 본당, 선교단체, 신심단체 등 모든 교회 단체의 활동을 위해서도 바탕으로 삼을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모두가 주님을 만난데서 오는 기쁨을 가지고 살며, 주님께서 맡겨주시는 복음선포 사명을 더욱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길을 계속 찾아나갈 것입니다.
2
기쁨에 넘쳐 돌아온 일흔 두 제자
루가복음 10장(1-24)은 성서 전체에서 [복음의 기쁨]이 제시하는 정신과 길을 가장 잘 보여주는 대목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뒤 주께서 달리 일흔 두 제자를 뽑아 앞으로 찾아 가실 여러 마을과 고장으로 미리 ‘둘씩 짝지어’ 보내시며 이렇게 분부하셨다.” 하느님의 일은 언제나 “함께” 해야 합니다. 혼자서는 하기도 어렵고 효과도 크지 않습니다. “단 두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다”(마태 18,19)고 주님께서도 약속하셨습니다.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들처럼 우리는 언제나 주님을 모시고 “함께 걸어야”(시노두스)합니다.
“추수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적으니 주인에게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달라고 청하여라.” 이런 상황은 언제나 계속됩니다. 할 일에 비해서 일꾼은 항상 부족합니다. 이것이 당신 곁에 두고 특별히 양성하신 열 두 제자 이외에, 당시 알려진 세상 모든 민족과 나라의 수에 해당하는 ‘일흔 두 제자들’을 보내신 이유입니다. 이 사실을 오늘의 상황에 옮겨놓고 보자면, 오랜 시간 동안 전문적 양성을 받으신 사제(신부님이)나 수도자로서는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할 일이 크고 많은 현실을 생각하게 합니다.
“떠나라!” 복음의 기쁨]은 어제 세례를 받은 분부터 한평생 신앙생활을 하신 분에 이르기까지, 하느님의 백성은 한 사람도 빠짐없이 각자 자신의 형편에 맞는 방식으로 복음선포를 위해서 ‘떠날 것’을 촉구합니다. 우리는 때때로, 있던 자리에서도 떠나고, 지금까지 가지고 살던 생각에서도 떠나고, 늘 하던 방식에서도 떠나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떠나라!”(창세 12,1)하고 말씀하셨을 때,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 등 익숙한 세상을 뒤로한 채 “자기가 가는 곳이 어떤 곳인지도 모르고 떠났던”(히브 11,8) 아브라함은 모든 믿는 이들의 선조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떠나라!” 하고 말씀하실 때, 두려움 없이 떠났던 이들은 하느님의 능력을 체험했습니다.
“이제 내가 너희를 보내는 것이 마치 어린 양을 이리떼 가운데 보내는 것과 같구나. ‘다닐 때 돈주머니도 식량자루도 신도 지니지 말 것이며’ 누구와 인사 하느라고 가던 길을 멈추지도 말라”(루가 10,2-4). 이리떼 속으로 들어가는 어린 양처럼, 어림도 없는 상황 속으로 보내시면서, 예수님께서는 인간적으로 의지할 만한 것들을 하나도 마련해 주시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결과는 참으로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일흔 두 제자가 기쁨에 넘쳐 돌아와 ‘주님, 저희가 주님의 이름으로 마귀들까지도 복종시켰습니다’ 하고 아뢰었다.” 하느님의 능력만을 믿고 떠난 결과였습니다.
“나는 사탄이 하늘에서 번갯불처럼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내가 너희에게 뱀이나 전갈을 짓밟는 능력과 원수의 모든 힘을 꺾는 권세를 주었으니 이 세상에서 너희를 해칠 자는 하나도 없다.” 인간은 “속임수를 쓰는 악마”(에페 6,11), 곧 마귀에게 속아 그 노예로 살고 있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님은 “하느님의 능력으로 마귀를 쫓아내고”, 그렇게 해서 ‘악마의 나라’ 대신 ‘하느님의 나라’가 오게 하시는 분이십니다(루가 11,20 참조). 그런데 이제 제자들에게도 “뱀이나 전갈을 짓밟는 능력과 원수의 모든 힘을 꺾는 권세”가 틀림없이 전해져서, 그들도 마귀를 물리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기뻐해야 할 이유는 거기에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악령들이 복종한다고 기뻐하기보다도 ‘너희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 그렇습니다. 우리를 “노예로 만들어서 공포에 몰아넣는”(로마 8,15) 악령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우리를 “하느님의 자녀로 만들어 주시는” 성령 안으로 들어가고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 라고 부를 수 있게 되는 것보다 인간에게 더 기쁜 일은 없습니다. “성령이 계신 곳에 자유가 있고”(2고린 3,17), 그때에 비로소 우리는 모든 속박에서 벗어나 참된 자유인이 되어, 사랑, 기쁨, 평화 등 성령께서 맺어주시는 열매(갈라 5,22-23)를 누리며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의 집, 하늘나라는 인간뿐 아니라 다른 모든 “피조물에게도 멸망의 사슬에서 풀려나서 하느님의 자녀들이 누리는 영광스런 자유에 참여할 날”(로마 8,21)을 기다리며 진통 속에서 희망을 가지고 고대하는 바로 그곳이기 때문입니다. 그 나라를 조금이라도 맛 본 사람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에 비추어 보면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고통은 아무것도 아니라고”(로마 8,18) 생각하게 됩니다.
일흔 두 제자들이 인간적으로 별 준비 없이 파견되었다는 사실에는 또 다른 면에서도 깊은 뜻이 있습니다. 특별한 교육이나 오랜 동안의 전문적 훈련을 받지 않았다는 것이 복음선포자로 나서기를 주저하게 하는 구실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알려주기 때문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말씀을 들어봅시다. “세례 받은 모든 이는 교회 안에서 수행하는 역할이나 신앙 교육의 수준에 관계없이, 복음화의 능동적 주체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참으로 체험한 사람이라면 그 누구라도 밖으로 나아가 그 사랑을 선포하는 데에 ‘오랜 준비나 긴 시간의 훈련이 필요 없습니다’.... (야곱의 우물가에서 예수님을 만난) 사마리아 여자, 성 바오로 등 성서에 나오는 첫 복음선포자들이 다 그랬습니다”(복음의 기쁨, 120항 참조).
3
하느님과 철부지 어린이
“오랜 준비나 긴 시간의 훈련이 필요 없습니다.” 이것은 세계 여러 지역, 특히 남미 각국에서 실제 경험을 통해서 얻은 결론입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사제만이 할 수 있는 성찬의 전례와 별도로 말씀의 전례를 독립해서 거행할 수 있다고 선언하자, 신자 수에 비해 사제가 크게 부족한 남미 여러 나라에서 주교들이 평신도들을 약간의 준비과정만을 거치게 한 다음, 사제들의 손이 닿지 않는 곳에 파견하여 성서를 알려주고 말씀을 전하게 했는데, 결과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할 만큼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곳의 사목자들은 일흔 두 제자를 파견하셨던 예수님께서 그들의 보고를 받으시고 “성령을 받아 기쁨에 넘쳐”(루가 10,21) 하신 말씀의 뜻을 비로소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늘과 땅의 주인이신 아버지, 지혜롭다는 사람들과 똑똑하다는 사람들에게는 이 모든 것을 감추시고 오히려 철부지 어린이들에게 나타내 보이시니 감사합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이것이 아버지께서 원하신 뜻이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저에게 맡겨 주셨습니다. 아들이 누구인지는 아버지만이 아시고 또 아버지가 누구신지는 아들과 또 그가 아버지를 계시하려고 택한 사람만이 알 수 있습니다”(루가 10,21-22). 바오로 사도 역시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같은 사실을 증언합니다(1고린 1,17-21 참조).
금마 본당의 84세 되시는 이 마리아 할머님이 생각납니다. 이분은 25세에 결혼하여 아들 하나를 낳으셨는데, 아기가 돌이 지나자 남편이 돌아가셔서 젊은 여인의 몸으로 세상의 풍파 앞에 놓였습니다. 젖먹이 어린 아기를 집에 두고 공장으로, 품앗이로 돈벌이를 위해 6년 동안이나 고생하고 있는 모습을 본 주변 사람들의 강요로 31살에 재혼하여 다시 2남 1녀를 두셨답니다. 그런데 그로부터 20여년 후에는 두 번째 남편과도 사별하였고, 71세가 되셨을 때에는 본인이 중병에 걸려 의사들도 포기하였는데, 어떤 수녀님이 손에 묵주를 쥐어 주며 기도해 주실 때 기적적으로 회복되어 곧바로 영세입교 하셨습니다. 그 이후 할머니의 삶은 완전히 바뀌어 집이 멀어 버스를 타야 하지만 매일 미사를 거른다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 되었습니다. 한글을 전혀 모르시던 할머니는 레지오 마리애나 미사 때 사람들이 책을 읽는 것을 보고는 글을 배우기로 결심하고, 남의 도움도 없이 한글을 깨우쳐 신약성서는 이미 다 읽으셨고, 지금은 필사를 하는 중이십니다. 또 “너희가 여기 있는 내 형제 중에서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 하신 말씀에 따라, 아프고 병든 이들을 찾아가 위로해 주고, 배고픈 사람들에게는 먹을 것을 챙겨주는 일을 열심히 하십니다. 그러니 이분의 집은 동네 사랑방이 되었고, 자연스럽게 선교가 이루어져서 스무 명이 넘는 동네 사람들이 이 할머니를 통해서 하느님을 알고 기쁘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4
하느님의 백성과 신앙 감각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 것은 “철부지 어린이”(루가 10, 21)처럼 순수하고 진실한 영혼에게 성령께서 “신앙 감각”(복음의 기쁨, 119,198항)이라는 특별한 지각능력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런 감각을 지닌 사람은 “하느님의 본성”(공본성성:복음의 기쁨, 119, 125항; 하느님의 본성: 교회에 관한 교회헌장, 40항)을 자기 안에 간직하고 있기 때문에, 하느님의 자녀답게 살아가게 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이런 분들, 한 마디로 “가난한 이들을 통하여 우리가 복음화 될 필요가 있다”(복음의 기쁨, 198항)고 말씀하십니다.
저는 몇 년 전부터 미사 때 강론하기 전에 여러분 가운데 한 분을 초대하여 신앙체험담을 들어왔습니다. 그때마다 마치 밭에 묻혀있던 보화를 발견한 듯한 기쁨을 느끼곤합니다. 함께 들은 모든 교우들도 큰 감동을 체험하지요. 앞에 소개한 할머님도 그렇게 해서 만난 분입니다. 그 많은 분들 가운데 이 분을 예로 든 것은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라, 이 이야기를 최근에 들어서 기억 속에 가장 생생하게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분들을 보면 사마리아 여자, 막달라 여자 마리아, 바오로, 베드로, 나타나엘 등 신약성서에 나오는 인물들의 이야기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고 느낍니다. 평범한 듯한 삶 속에서 주님을 만나 참된 기쁨을 체험하고 그렇게 해서 복음을 증언할 수 있는 분들이 우리 주변에 대단히 많은 것입니다.
그와동시에, 우리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정신을 이어받아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강조하시듯이, 세례성사를 받은 모든 이는 복음을 전하는 사도가 되어야 하고, 또 이 일을 충분히 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사목자들은 과중한 일 때문에 지치지 않고, 교우들 쪽에서는 교회 생활에서 적극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몫이 분명하고, 그 일에 따른 기쁨이 다른 어떤 즐거움에 비할 수 없다는 사실을 체험하며, 큰 보람과 확신을 가지고 복음선포에 뛰어들게 될 것입니다. 더 나아가 평신도, 수도자, 성직자로 이루어지는 하느님 백성 전체가 성령께서 주시는 은사에 따라 각자 고유의 방식으로 “그리스도의 사제직, 예언직, 왕직”(교회에 관한 교의헌장, 31항 참조)에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뜻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거룩한 목자들은 평신도들이 교회 안에서 지니고 있는 품위와 책임을 인정하고 향상시켜 주어야 한다. 그들의 의견을 기꺼이 참작하고, 그들을 신뢰하여 교회에 봉사할 일들을 맡기며, 행동의 자유와 여유를 그들에게 남겨줄 뿐 아니라 자발적으로 일을 시작할 수 있도록 격려해야 한다. 평신도들의 창의성과 요청과 소망을 그리스도 안에서 아버지다운 사랑으로 존중해야 한다...평신도와 사목자들이 이루는 이런 가정적 친교 안에서 우리는 교회에 큰 선익을 기대할 수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평신도들의 책임감이 커지고 열성이 불타올라, 사목자들의 일에 평신도들이 보다 쉽게 협력할 수 있겠기 때문이다. 또 사목자들은 평신도들의 경험에서 도움을 받아 영적인 일에서나 현세적 일에서 보다 확실하고 적절한 판단을 내릴 수 있을 것이며, 따라서 교회 전체가 모든 지체들의 힘을 합하여 현세의 사명을 보다 효과적으로 완수하게 될 것이다”(같은 헌장 37항).
평신도들은 세상 속에 살면서 그에 따른 온갖 “기쁨과 희망, 슬픔과 번뇌”(현대세계 사목헌장, 1항)를 체험하고, 특히 “가난한 사람과 고통에 신음하는 모든 사람들”은 삶에 따른 빛과 그림자를 온 몸으로 겪으며 사는 이들입니다. 더욱이 오늘의 사회-정치-경제적 상황은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치 급격히 변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 환경에서 살고 있는 평신도들의 경험은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어야 할 교회의 사명을 제대로 수행하기 위해서 없어서는 안 될 만큼 중요합니다. 그래서 사목자와 평신도들 사이의 상호 보완과 협력의 필요성은 날로 더 절실해지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현세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 [현대세계 사목헌장]은 ‘평신도 사도직의 성서’라고까지 불립니다. 이 문헌은 현실 문제에 관한 그리스도인의 입장을 두고, 신앙생활은 경신례와 몇 가지 윤리적 규정을 지키는 것으로 만족하고 현실문제에는 눈을 감고 사는 태도와 하느님과의 관계는 젖혀두고 현세의 일에만 파묻혀 사는 식의 양 극단을 피할 것을 주문합니다(현대세계 사목헌장, 43항 참조).
5
모두가 한 몸
이렇게 해서 성직자와 평신도가 같은 하느님 백성으로서 상호 보완하고 협력하면, 바오로 사도가 꿈꾸던 교회의 모습이 실현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불러 주셨으니 그 불러 주신 목적에 합당하게 살아가십시오. 겸손과 온유와 인내를 다하여 사랑으로 서로 너그럽게 대하십시오. 성령께서 평화의 줄로 여러분을 묶어 하나가 되게 하여 주신 것을 그대로 보존하도록 노력하십시오. 그리스도의 몸도 하나이며 성령도 하나입니다. 이와 같이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당신의 백성으로 부르셔서 안겨 주시는 희망도 하나입니다. 주님도 한 분이시고 믿음도 하나이고 세례도 하나이며 만민의 아버지이신 하느님도 한 분이십니다”(에페 4,1-6). 그런데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사람들에게 각각 다른 선물을 은총으로 주셔서 어떤 사람들은 사도로, 어떤 사람들은 예언하는 사람으로, 어떤 사람들은 전도자로, 어떤 사람들은 목자와 교사로 삼으셨습니다. 그것은 성도들을 준비시켜서 봉사활동을 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몸을 자라게 하시려는 것입니다”(에페 4,1-12).
성도들 가운데에서도 예수님의 뒤를 충실히 따라 죽음으로 복음을 증언하고 믿는 이들의 가슴속에 살아계신 순교자들은 특별한 은사를 받은 분들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는 그런 분들이 만여 명이나 됩니다. ‘순교자’란 본래 ‘증인’이라는 말입니다. 어떤 모양으로든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서 그분만이 주실 수 있는 기쁨과 평화를 체험한 사람은 모두 복음의 증인입니다. 그런 의미의 증인 혹은 순교자는 오늘도 우리 주변에 수없이 많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겉으로 보기에는 눈에 띄는 구석이 전혀 없고, 아는 것도 변변치 않은 듯하지만, “십자고상을 바라보는 깊은 사랑의 눈길”(복음의 기쁨, 125항)을 가진 사람들을 눈여겨보라고 하십니다. 과연 우리가 눈을 잘 뜨고 보면, “이 악하고 비뚤어진 세상”(필립 2,15)에도 악의 세력보다 더 강하고 놀라운 “복음의 증인들이” 구름처럼 우리를 둘러싸고 있음을 발견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새로운 눈으로 보게 해 주시는 오늘의 증인들이 누구인지 들어봅시다. “인내심을 가지고 아이들을 자상하게 또 사랑으로 기르는 여자, 빵을 벌어오기 위해서 열심히 일하는 남자, 주님을 바라보며 아픔을 견뎌내는 병자, 그렇게 많은 상처를 안고 있으면서도 주님을 섬긴다는 사실 때문에 얼굴에 미소를 잃지 않는 사제, 힘들게 일하면서 거룩함을 감추고 사는 수녀님들. 이것이 저에게는 보통의 일상적 거룩함입니다. 저는 자주 거룩함을 인내와 연결시킵니다. 삶에서 겪는 큰 어려움 속에서 의연하게 견디어내는 태도뿐 아니라, 그날그날의 삶을 앞으로 이끌어나가는 항구함도 여기에 속합니다. 이냐시오 성인이 말씀하신, 싸우는 교회의 거룩함이 바로 이것입니다. 이것이 저의 부모에게서 볼 수 있는 거룩함이었습니다”(하느님께 활짝 열린 마음, 26쪽).
예수님을 가까이 따르려는 사람은 십자가를 각오해야만 합니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너희보다도 나를 먼저 미워했다는 것을 알아 두어라. 너희가 만일 세상에 속한 사람이라면 세상은 너희를 한 집안 식구로 여겨 사랑할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세상에 속하지 않았을 뿐더러 오히려 내가 세상에서 가려낸 사람들이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는 것이다”(요한 15,18-19). 이것은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일종의 예방주사라 할 수 있습니다. 제자들이 어떤 박해도 두려워하지 않고 목숨까지 바칠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께서 바로 앞에서 하신 말씀과 약속이 그들의 뼈와 살 속에 박혀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택하여 내세운 것이다. 그러니 너희는 세상에 나가 언제까지나 썩지 않을 열매를 맺어라. 그러면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하는 것을 다 들어 주실 것이다. 서로 사랑하여라. 이것이 너희에게 주는 나의 계명이다”(요한 15,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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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 선열들의 증언
2014년 8월 16일에 복자로 선포되신 우리나라 교회 역사 초기의 순교자 124위는 가장 모범적인 복음의 증인들로서 하늘의 별처럼 빛을 내고 계십니다. 이 모든 분들을 대표하는 윤지충 바오로, 다블뤼 주교로부터 “한국 순교사에서 가장 빛나는 진주”라는 평가를 받으신 이순이 루갈다, 호남의 사도 유항검 아우구스티노를 포함한 우리 교구 순교자 24위는 이 가운데에서도 특별히 찬란하게 빛나는 별들입니다. 그래서 한국천주교주교회의는 2014년 봄 총회에서 이번에 복자로 선언되신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123위 순교자 기념 축일을 우리 교구 숲정이에서 처형되신 신태보 등 다섯 분의 순교 일을 잡아 5월 29일로 정했습니다. 순교자들 가운데 몇 분의 모습을 돌아봅시다.
먼저, 유항검 아우구스티노는 전국에서 10여명에 이르던 다른 분들과 함께 실제로 사제직을 수행하여 미사를 드리고 고백성사도 집전했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다가 교회 서적을 연구하던 중 사제가 되기 위해서는 합당한 준비와 절차를 따라 정식으로 사제품을 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중앙에 연락하여 한 때의 실수를 바로잡고, 정식 사제를 모셔오는 일에 발 벗고 나섰습니다. 물론 직무 사제직과는 다르지만, 평신도의 일반 사제직, 예언직, 왕직을 인정하게 된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시대에 와서 돌이켜 생각해 보면, 이른바 가성직 제도는 우리나라 평신도 사도직의 효시를 보여준 사례라고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정신은 지금도 생생하게 살아 있어서, 우리나라 평신도들의 적극성과 헌신적 자세는 세계에서도 모범적이라고 할 것입니다.
이순이 루갈다는 죽으면서도 기뻐하는 모습이 많은 사람에게 큰 감동을 주었는데, 비신자인 한 교수는 말했습니다. “죽음 앞에서 그렇게 기쁨을 간직할 수 있었던 이순이는 한국 역사에서 그 이전에는 찾아볼 수 없는 새로운 인간이었다. 새로운 인간의 출현이었다.” 전해지는 말에 따르면, [백서]의 저자로 잘 알려진 황사영은 “주님을 위해서 죽었다고 다 순교자가 되는 것이 아니고, 기쁘게 죽어야 진정한 순교자다” 하고 말했다고 합니다.
윤지충과 권상연을 심문했던 전라도 관찰사가 조정에 보내는 보고서에도 이렇게 적혀있습니다. “형문을 당할 때 이것저것 심문하는 과정에서 피를 흘리고 살이 터지면서도 찡그리거나 신음하는 기색을 얼굴이나 말에 보이지 않았고, 말끝마다 천주의 가르침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심지어는 ‘임금의 명을 어기고 부모의 명을 어길 수는 있어도, 사형의 벌을 받는다 하더라도 천주의 가르침은 결코 바꿀 수 없다’고 하였으니, 확실히 칼날을 받고 죽는 것을 영광으로 여기는 뜻이 있었습니다.”
김대권 베드로는 배교를 강요하는 이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매질로 죽게 된다 하더라도 하느님을 부인할 수 없으며, 이 생각은 제 살 깊숙이 스며들어 있고, 제 뼛속 깊이 젖어 있습니다. 내 살을 잘라 내더라도, 내 뼈를 으스러뜨리더라도, 수천만 번 물어도 내 대답은 언제나 ‘아니오’ 입니다. 나는 나의 하느님을 배반할 수 없습니다.”
12살의 어린 나이에 처형당하여 한국 교회 역사상 최연소 순교자가 된 이봉금 아나스타시아는 배교하라는 관장의 말에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일곱 살이 되기 전에는 철도 없고 글을 읽을 줄도 모르고 아무것도 몰라서 하느님을 잘 신봉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일곱 살 때부터 저는 하느님을 섬기고 흠숭해 왔는데 어떻게 오늘 그분을 부인하라고 하십니까? 하물며 그분께 욕을 할 수는 더더욱 없습니다. 저는 죽을지언정 그것만은 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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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 만질 수 있게 된 말씀
어떤 모양으로든지 죽었다가 부활하신 주님을 알고 만난 사람들은, 이처럼, 나이나 사회적 신분과 상관없이 인간적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모습으로 변합니다. 그런 변화는 주로 사람이 되신 말씀, 복음이 물처럼 또 쌍날칼처럼, 살 속에 스며들고 뼛속에 깊이 박혀 일으키는 일입니다. 말씀이 그 사람 안에서 “영과 생명이 되어”(요한 6,63 참조) 그를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말씀이 그런 사람에게는 더 이상 귀로만 듣는 어떤 것이 아니고,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실체가 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사도 요한이 첫 번째 편지 서두에서 한 말을 기억하게 됩니다. 요한은 말씀을 만난 일과 기쁨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우리는 생명의 말씀에 관해서 말하려고 합니다. 그 말씀은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계셨습니다. 우리는 그 말씀을 듣고 눈으로 보고 실제로 목격하고 손으로 만져 보았습니다. 그 생명이 나타났을 때에 우리는 그 생명을 보았기 때문에 그것을 증언합니다. 우리가 여러분에게 선포하는 이 영원한 생명은 아버지와 함께 있다가 우리에게 분명히 나타난 것입니다. 우리가 보고 들은 그것을 여러분에게 선포하는 목적은 우리가 아버지와 그리고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사귀는 친교를 여러분도 함께 나눌 수 있게 하려는 것입니다. 우리는 충만한 기쁨을 맛보기 위해서 이 글을 써 보냅니다”(1요한 1,1-4).
이 지점에서 우리는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시복 미사 강론 중 한 토막을 생각하게 됩니다. “하느님의 신비로운 섭리 안에서, 한국 땅에 닿게 된 그리스도교 신앙은 선교사들을 통해 전해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한민족, 그들의 마음과 정신을 통해 이 땅에 그리스도교 신앙이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지적 호기심과 종교적 진리의 탐구를 통해 촉발되었습니다. 복음과 처음으로 만난 한국의 첫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께 자신의 마음을 열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고난을 받으시고 돌아가셨다가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신 그리스도에 대해 더욱더 많이 알고자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에 대한 어떤 깨달음은 곧 주님과의 만남으로 이어져, 첫 세례와 더불어 충만한 성사 생활과 교회적 신앙생활에 대한 열망, 그리고 선교 활동의 시작으로 계속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더 나아가, 전통적인 사회적 신분의 차별과 상관없이, 믿는 이들이 모두 한마음 한뜻이 되어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던 초대 교회의 삶(사도 4,32 참조)에서 영감(靈感)을 받아, 한국의 신자 공동체들 안에서도 많은 열매를 맺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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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들의 공동체가 되어야 할 본당 구조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말씀과 같이, 우리 순교 선조들이 사셨던 시대로부터 시작하여 약 50년 전까지만 해도, 우리나라 대부분의 본당과 공소는 규모도 작고 교우들이 서로 잘 아는 사이여서, 말 그대로, 형제자매로서의 정과 사랑을 나누며 서로 돕는 가족과 같았습니다. 그래서 황일광이라는 순교자는 신앙 공동체에 들어와 사는 행복을 두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에게는 천국이 둘 있다. 하나는 죽어서 가는 천국, 또 하나는 살아서 이미 들어와 있는 천국이다.”
그런데 이런 일은 과거에나 가능했던 것이 아닙니다. 지금도 서로 얼굴뿐 아니라, 이름과 성격, 취미,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 기쁨, 슬픔 등 모든 것을 서로 나누며 가족과 같은 공동체를 이루어 살아가는 데가 여기저기에 있습니다. 본당 사목구를 소규모로 나누어, 소그룹 안에서 하느님 말씀을 중심으로 함께 삶을 나누면 그렇게 됩니다. 그러면 본당 사목구는 작은 공동체들이 모여서 이루는 큰 공동체가 되고, 소공동체의 활력과 기쁨이 전체로 퍼져나가 활기찬 대공동체가 됩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말씀하십니다. “본당 사목구는 공동체들의 공동체이고, 길을 가다가 목이 마른 사람들이 물을 마시러 오는 지성소이며, 지속적인 선교활동의 중심지입니다”(복음의 기쁨 28항).
그런데 지금 대부분의 본당 사목구는 본래적 의미의 소공동체를 기반으로 하는 “공동체들의 공동체”라 하기에는 조직이나 체제에 부족한 면이 많은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교황님은 이어서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본당 사목구의 개편과 쇄신에 대한 호소가 아직은 충분히 실현되지 못하고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본당 사목구는 사람들에게 더욱 가까이 다가가 살아 있는 친교와 참여의 장이 되고 온전히 선교를 지향해야 합니다”(같은 곳).
그렇게 되면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이상으로 내걸고 실현시키고자 했던 초대교회(사도, 2, 42-47; 4, 32-35)의 모습이 실제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초대 교회에서는 신자들이 한 자리에 모여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친교를 이루며, 빵을 나누고, 함께 기도하며, 삶을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모습이 보는 사람들의 마음에 깊은 감동을 일으켜 그런 공동체에 들어오려는 사람들이 크게 늘었습니다. 오늘날 이런 모습을 다시 구현하기 위해서는 다음 두 가지가 특별히 필요합니다.
첫째, 복음이 중심이 되는 공동체 : 교황님께서는 구약성서과 신약성서의 핵심 메시지가 그리스도께서 가져오시는 기쁨을 향하고 있음을 밝혀 주십니다. 그래서 부활 시기 없이 사순 시기만 살아가는 것처럼 보이는 그리스도인들뿐 아니라, 여러 어려움으로 힘들어 하는 이 시대 사람들에게 복음이 유일하면서도 최고의 치유제가 될 수 있음을 강조하십니다. 우리는 지난 여러 해 동안 하느님 말씀을 위해서 많은 노력과 정성을 기울여왔기 때문에 많은 분들이 이미 이 점에서 준비가 잘 되어 있습니다. 이 모든 노력이 이제 소공동체를 통해서 더욱 풍성한 결실을 맺어 교황님이 말씀하시는 참 기쁨을 더욱 깊게 체험하고, 그것을 이웃에게 전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윤리적 선택이나 고결한 생각의 결과가 아니라, 삶에 새로운 시야와 결정적인 방향을 제시하는 한 사건, 한 사람을 만나는 것”(7항)이기 때문입니다.
둘째, 신비적 형제애, 관상적 형제애를 실현하는 공동체 : 교황님께서는 현대인이 지닌 두 가지 위험으로 극심한 소비주의와 더불어 내적 생활까지 개인의 이해와 관심에만 갇혀 있는 극심한 개인주의를 지적하십니다. 예로니모 성인이 말씀하신 것처럼, 성서를 읽더라도 혼자 읽어서는 그 의미를 제대로 깨달을 수 없습니다. “성서는 하느님 백성에 의하여, 하느님 백성을 위하여, 성령의 영감으로 기록되었습니다. 하느님 백성과의 이러한 친교 안에서만 우리는 참으로 ‘우리’로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자 하시는 진리의 핵심 속으로 파고들 수 있습니다”(주님의 말씀, 30항). 공동체 안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있고, 성령께서는 그들의 각기 다른 체험들을 통해서 성서 말씀의 본래 의미를 더 풍요하고 깊게 알아듣도록 도와주실 것입니다. “성서 본문의 올바른 이해는 거기서 이야기하는 내용과 비슷한 체험을 가진 사람들에게만 허락”(같은 곳)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황님께서는 다른 이들과 깊고 안정적인 유대를 맺지 못하고 남의 눈에 띄지 않게 숨어 다니는 이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발견하기 위해 과감히 이웃과 대면하고, 그들을 통해서 “신비적 형제애, 관상적 형제애”(복음의 기쁨, 92항)를 체험하도록 권고 하십니다. 신자들이 둘러 앉아 성서를 함께 읽고 나눌 때, 성령의 도움을 받아 새롭게 들려진 하느님의 말씀은 저마다 다른 생각과 성격을 지닌 구성원 모두를 변화시켜 회개의 공동체를 이룰 수 있게 하십니다. 그렇게 하여 새롭게 된 공동체는 밖으로 나가 세상에 복음을 선포하고 스스로 체험한 기쁨을 다른 이들에게 전하지 않을 수 없는 심정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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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복음화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복음을 선포하는 일에서 그 동안 써와서 익숙하게 된 방법을 과감하게 떨쳐 버리고 새로운 방법을 써야만 합니다. 그렇게 해서 열정이 새롭게 불타오르게 하고, 표현도 참신한 것을 계속 찾아나가자는 것이 새로운 복음화의 정신입니다. 우리가 여기에서 요약하여 제시한 프란치스코 교황의 가르침을 충실히 따라가면, 틀림없이 새로운 복음화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권고와 순교 선열들의 정신을 받아 모두가 “위에서 오는 능력”(루가 24,49)만을 믿고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일에 주저 없이 뛰어들어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일흔 두 제자들처럼, 우리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되었다는 확신을 가지고 기쁨에 넘칠 것이며, 그런 우리를 보시고 주님께서도 기쁨에 넘치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 우리는 바오로 사도의 기도가 우리 안에서 이루어짐을 깨닫고, 우리 자신도 다른 이들을 위해서 똑같은 말로 기도하게 될 것입니다.
“나는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가족에게 이름을 주신 하느님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드립니다. 넘쳐흐르는 영광의 아버지께서 성령으로 여러분의 힘을 돋우어 내적 인간으로 굳세게 하여 주시기를 빕니다. 그리고 아버지께서 여러분의 믿음을 보시고 그리스도로 하여금 여러분의 마음속에 들어 가 사실 수 있게 하여 주시기를 빕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사랑에 뿌리를 박고 사랑을 기초로 하여 살아감으로써 모든 성도들과 함께 하느님의 신비가 얼마나 넓고 길고 높고 깊은지를 깨달아 알고 인간의 모든 지식을 초월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해서 여러분이 완성되고 하느님의 계획이 완전히 이루어지기를 빕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안에서 힘차게 활동하시면서 우리가 바라거나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풍성하게 베풀어 주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하느님께서 교회와 그리스도 예수를 통하여 세세 무궁토록 영광을 받으시기를 빕니다. 아멘”(에페 3, 14-21).
천주교 전주교구장 이 병 호(빈첸시오) 주교